굴불사터 석가여래 불두는 일본땅
어디쯤에 있을까?
1915년대의 굴불사지 사면석불
보수된 현재의 모습
일제 밑에서 한국의 종류의 문화재가 얼마나 처참하고 어이없게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거나 파괴당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조사·파악하고 있는 오늘의 국내 전문가들은 특히 굴욕의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를 "완전 무법과 묵인된 약탈의 시대"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반출 혹은 약탈한 우리의 문화재는 부지기수란 표현이 모자랄 정도라고 말한다.
현재 보물 제121호로 지정돼 있는 경주시 동천리 굴불사터의 자연암 '사면석불' 의 남쪽면에 해당되는 고부조는 석가여래삼존상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본존 석가여래의 머리 부분과 오른쪽의 협시보살상 전체를 정으로 쪼아 떼어간 악당이 있었다. 곧 "완전 무법과 약탈의 시대" 에 있었던 기막힌 수난의 하나였다.
반쯤 땅속에 묻혀 있던 '사면석불' 을 현재와 같이 전모를 볼 수 있게 파올린 것은 1914∼1915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을 들고 온 무법자에 의해 석가여래의 불두와 전신상의 협시보살 부분이 감쪽같이 떼어져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 일본인 학자나 관계전문가들은 애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모른 체함으로써 1960년 무렵까지만 해도 누구 하나 그 부분을 주목하고 의심한 전문가가 없었다.
1960년께였다. 당시 문교부 국보보존위원회 위원이었던 간송 전형필 선생과 이홍직·황수영 교수 일행이 경주의 유적을 조사하러 갔다가 굴불사터의 '사면석불' 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일행의 화제가 드디어 반세기전에 일본인 악당이 감쪽같이 떼어 간 부분에 미치게 되었다.
예리한 눈으로 먼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간송이었다. 일행은 긴장하여 그 자리에서 세밀한 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큰 바윗덩이의 암면 부조의 하나인 남쪽면의 오른쪽에서 본존상의 머리와 협시보살상 전체를 기술적으로 쪼아 떼어간 정 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그 보살상의 가장자리로 이어져 있던 천의 자락이 얇고 섬세한 부분까지는 도저히 떼어갈 수 없었던 점이 주목되었다.
그리고 몇 해 후 한일회담 문화재관계 한국대표로 일본에 건너갔던 황수영 교수는 교토대학 고고학 연구실에서 1915년께에 찍은 경주 굴불사터 '사면석불' 의 사진 원판들을 보았다.
거기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 있었다. 불두와 보살상을 떼어 간 직후의 사진이어서 그 자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희고 생경한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드디어 모든 것은 판명되었다.
1969년에 문공부와 문화재관리국이 간행한 (문화재대관) (보물편) 중편의 '굴불사터 석불상' (사면석불) 도판해설은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사면석불의 남면상은 원래는 삼존상으로 만든 것이지만 일제 때에 오른쪽 보살상을 완전히 떼어 가고 본존상의 머리까지 떼어 간 참혹한 수난을 입었다."
반세기 전에 일본인 악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떼어져 간 비운의 '사면석불' 남면의 석가상 불두와 그 옆의 보살상은 지금 일본의 어느곳에 가 있을까.
************************** <한국문화재 비화/ 김구열저1973년 >에서
본존상의 머리와 협시보살상 전체를 떼어간 남쪽면
'문화,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불국사 1200년 간 지진 견딘 비결,석축 ‘내진 설계’에 있었다 (0) | 2007.11.13 |
---|---|
[스크랩] 견우불과 직녀불로 거듭난 여왕과 대각간의 사랑-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 (0) | 2007.11.13 |
안중근 의사 친필 보물로 지정 (0) | 2007.11.07 |
1400년 견딘 사리함의 비밀 (0) | 2007.11.05 |
[스크랩] 왕흥사 목탑, 위덕왕이 세 왕자 위해 세운것 (0) | 2007.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