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1400년 견딘 사리함의 비밀

道雨 2007. 11. 5. 11:37

 

 

 

            1400년 견딘 사리함의 비밀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1400여 년 전 사리함, 명문과 유적들이 논란거리 던져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400여 년 전, 비명에 간 백제 왕자의 추모용 사리(부처, 성자의 주검을 화장한 뒤 나오는 구슬 모양 유골 조각)함이 후대 역사를 뒤흔들고 있다.

   백제 27대 위덕왕이 즐겨 찾던 사비 도읍(충남 부여) 왕흥사 절터의 목탑터 심초석 밑에서,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한자 글씨가 새겨진 사리함과 그 안의 금은 사리병, 그리고 이들을 땅에 묻을 때 액운 없기를 빌며 같이 묻은 진단구 장식들이 지난주 세상에 다시 나왔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6세기 백제 유일의 사리장엄구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년부터 8차례 발굴 끝에 찾아낸 것이다. 이들 유물은 흙층 속에서 도굴의 손길을 타지 않고 1400여 년을 견뎠다. 생생한 보존 상태와 예상 밖의 이른 연대 때문에 도굴되어 돌아다녔다면 모두 가짜 판정을 받았을 것이란 말까지 나왔다.

 



△부여 왕흥사 목탑터에서 나온 6세기 백제 사리장엄 용기. 맨 오른쪽 용기가 명문이 새겨진 청동 사리함. 보주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뚜껑으로 덮였다. 이 함 안에 중앙의 은제 사리병이 외병으로 들어갔고, 이 병 안에 다시 맨 왼쪽의 금제 사리병(내병)이 들어 있었다. 글씨는 사리함의 명문.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서릿발처럼 준엄하고 단순한 원통형 청동 사리함과 내부의 귀금속 사리병, 고졸한 함의 명문 29자, 정교함과 다채로움을 겸비한 진단구 유물들은, 사료가 부실한 백제학계에 단비를 뿌렸으나, 풀어야 할 수수께끼 또한 한 무더기다. 전문가들에게 자문해 이번 발굴이 남긴 수수께끼들을 추려보았다.

 

명문과 <삼국사기>의 내용 달라

  왕흥사터 사리함 명문은 국내 최고의 역사서로, 역사 편년에 관한 한 무오류의 정전으로 통했던 <삼국사기>의 정확성 논란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다.

  왕흥사 창건 연대에 대한 사기의 기록이 사리함 명문의 기록보다 23년이나 뒤처지기 때문이다. 명문에는 ‘정유년(577) 2월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고 음각한 한자로 새겼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5권’은 위덕왕의 다음 임금인 법왕 2년(600) 정월에 왕흥사를 창립해, 그 다음 왕인 무왕 35년인 634년 2월 준공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문이 거짓을 쓸 수 없으니 사서 기록이 잘못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발굴품 명문의 연대가 <삼국사기> 기록과 엇갈린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학계에선 사서가 완전히 틀렸다는 단정론, 탑만 일단 세운 것을 절을 세운 것으로 명문이 해석했다는 견해 등이 나온다. 사서에 언급된 왕흥사보다 선행하는 형식의 건물이 있었고, 그게 후대 법왕 때 왕흥사란 절로 낙성됐다는 주장이다.

   명문 가운데 ‘입찰본사리이매장시’(立刹本舍利二枚葬時), 곧 사찰을 세우고 본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라고 해석되는 대목은 논쟁적이다. 이런 행위만으로 절을 건립한 것으로 볼 것인지, 절을 지을 때 탑을 먼저 세운 뒤 나머지 금당, 강당들을 잇따라 세운 것을 절을 세운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찰이 탑, 금당, 강당을 한 짝에 갖춰야 온전한 절의 건립으로 고대인들이 간주했는지를 따져보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고대사 연구자인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사찰을 만든 시기, 세운 이유와 주체도 사리기 명문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각각 달라 격론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하지만 사서가 무조건 틀렸다고 단언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학예관도 “<삼국사기>의 왕흥사 건립 연대가 완전히 틀린 것으로 확인되면 <삼국사기> 기년의 신빙성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며 “결론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문화재청 쪽은 이와 관련해 연말까지 임시 특별전과 중국, 일본 쪽 학자들을 초청한 국제 학술대회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 백제 위덕왕의 원찰로 드러난 부여 규암면의 왕흥사터 발굴 복원도. 백마강변에 있는 선착장과 어도를 통해 곧장 1탑1금당 양식의 절 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사라진 사리, 놀라운 마이크로 미학

  백제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황금 사리병 안에는 사리가 없고, 맑은 물만 고여 있었다. 후대에 사리기를 손댄 흔적이 전혀 없어 사리의 행방을 놓고도 말들이 많다.

  김용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사리기에 사리가 없는 경우는 꽤 된다. 부식된 구멍으로 사리알이 빠져나가거나 외부의 압력이나 화학작용에 의해 녹거나 사라지는 경우도 가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공예사 연구자인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학예관은 “단단한 사리는 고온의 화장을 견뎌 생긴 것으로 물에 녹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리병 뚜껑 덮개의 긴 틈 등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추측했다.

  황금 사리병을 싼 은 사리병 속에서 작은 알갱이 한 개가 발견된 것을 학계는 주시하고 있다. 연구소 쪽은 사리병 속 물과 은병에서 나온 알갱이의 성분분석을 벌이기로 했다.

  사리구를 묻은 심초석 남쪽 땅속에서 쏟아져나온 수천 점의 장신구, 장식물 등의 진단구들은 당시 동아시아 문명권을 대표하는 초정밀 미세공예품들이다. 목걸이, 귀고리, 장식 버클, 관대 등 백제 귀족들이 평소 썼을 법한 장신구들이다. 투명한 운모를 미세하게 다듬어 연꽃 모양을 만들고 금줄까지 두른 미세 장식, 작은 고리들을 여러 개 이어붙여 마치 축구공처럼 만든 구체 액세서리 장식물들은 디자인, 기법의 독창성 측면에서 전례가 거의 없는 최고 명품이다.

  고대 장신구를 연구해온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고리를 이어붙인 금동구체 장식물의 경우, 중간중간 연결된 접점에 1㎜ 정도에 불과한 금속 알갱이들을 붙이는 마감 방식까지 사용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정밀 광학기기도 없던 시절, 백제의 장인들은 어떻게 상상을 초월하는 마이크로 미학을 실현했을까. 이 교수는 “6세기 초 무령왕릉의 공예품보다 더 뛰어난 기술력과 조형 수준을 보여준다. 금동대향로를 만들었던 6세기 중엽의 능산리 사찰 건립 시기를 지나면서 전체적으로 나라의 문화적 역량이 정비된 상황에서 이런 제작 양상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작은 금고리를 무수히 이어 만든 공 모양 금동 장식물과 투명한 운모로 만든 미세한 연꽃 장식물. 당시 동아시아 미세 공예미술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지고의 명품들이다.

 

임금의 직통 참배로가 60m 넘어

  백마강 어귀의 왕흥사터 발굴은 백제 왕실이 자주 찾은 이른바 강변 가람의 특이한 얼개를 처음 드러냈다. 폭이 13m에, 길이만 60m가 넘는 장대한 어도(임금이 다니는 참배로)가 절터 정문 바깥 축대에서 확인된 것이다. 진입로와 목탑 금당이 일직선을 이룬 특유의 가람에 왕이 배를 타고 그 앞 어도로 들어와 곧장 진입할 수 있는 얼개인 셈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 등이 백마강을 건너 왕흥사에 수시로 행차해 향을 피우고 참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고학자인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일당일탑 가람지 바로 앞에 선착장에서 오는 참배길이 직통으로 이어진 구조는 중국, 일본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왜 물가 근처에 진입로를 두고 원찰가람을 배치했는지 그 배경을 밝히는 것도 흥미진진한 탐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왕흥사지에서 남쪽 어도의 아랫부분은 선착장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데, 행차에 쓰였던 배의 파편이나 선착장 시설의 발굴이 기대되고 있다.

   백제 왕실은 왜 강변 선착장에서 절까지 직통 참배로를 대는 원찰을 꾸렸을까. 위덕왕이 왕흥사터에 남긴 유물과 유적들은 새 논란거리를 던지면서 백제 문화사의 장막을 조금씩 걷어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