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천전리 각석

道雨 2007. 12. 20. 16:40

 

 

 

                                 천전리 각석

 

 


0. 개요

  * 국보 제147호

  *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소재

  * 선사시대의 기하학적 무늬와 신라시대의 그림과 명문 등이 새겨져 있는 암각화.


0. 발견 경위

  * 동국대 박물관 문명대 교수 팀이 3년 계획으로 불적조사(1968-1970)를 하면서, 이 계곡 어디엔가 원효가 주석했다던 반고사지를 찾고 있던 중, 마을 주민의 제보로 이곳 천전리 각석을 발견(1970년 12월 24일)

  * 그로부터 1년 뒤인 1971년 12월 25일, 다시 인근의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나라 선사문화 연구의 신기원을 이룸.


0. 무늬와 그림, 글씨

  * 무늬 : 수많은 마름모와 동심원 등의 기하학적 무늬가 물결치듯 꿈틀거리고 있다. 이 무늬들은 농경생활과 직결되는 태양, 곡물의 성장, 여성의 성기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시기는 신석기 중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추정된다.

  * 그림 : 신라 귀족의 행렬도, 배와 물고기, 용과 사슴 등의 그림이 음각되어 있다.

  * 글씨 : 신라 명문의 글씨와 문장이 300여자의 한자로 새겨져 있다. 하단부에는 유독 랑(郞)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신라의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기르며 마음의 수양을 하던 국토 순례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0. 세부사항

  # 신라시대 명문(원명, 추명)

    * 원명은 진흥왕의 부친인 사부지(徙夫知) 갈문왕(왕의 부모나 여왕의 남편이나 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과 사촌 누이가 놀러 와서 그곳을 유람한 기념으로 법흥왕 12년(525년)에 새긴 것.

    * 추명은 사부지 갈문왕 일행이 처음 이곳을 찾은 지 14년이 지난 후인, 법흥왕 26년(539년)에 다시 이곳을 찾은 것을 기념하여 기록해 놓은 것.

    

     @ 원명

       “을사년에 사탁부 갈문왕(법흥왕의 동생 사부지 갈문왕)이 찾아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지만, 이름이 없어 좋은 돌을 얻어 이름을 서석곡(書石谷)이라 새겼다. 함께 온 이는 사랑하는 누이와 아름다운 덕과 밝고 신묘한 어사 추안량(麗德光妙於史鄒安郞)과 셋이다. 먹을 것을 잡아주는 사람(食多 作功人)은 아리부지 대나마와 실득사지대사제지이며, 음식 만드는 이(作食人)는 영지지 일길간지의 처 거지시해 부인과 사간지 진육지의 처 아혜모홍 부인이고, 글을 짓고 새긴 이(作書人)는 모모이지대사제이다.”

     @ 추명

        “ 지난 을사년(525년) 6월 18일 새벽에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 어사 추안량 셋이 함께 놀러왔다. 후년(537년)이 지나서 내 누이는 죽었다. 죽은 내 아내는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였다. 정사년(丁巳年) 왕(갈문왕)이 이 서석을 보러 와서 지난날의 왕비(지혜시몰비)를 사랑하며, 스스로 생각(愛自思)했다. 기미년(539년) 7월 3일에 모즉지태왕비 부걸지 사부지왕 자랑인 심맥부지가 함께 왔다. 음식 만든 사람(作食人)은 진육지 파진간지의 아내 아혜모호 부인과 이부지 거벌간지의 아내인 일리등차 부인과 거래차의 아내인 사효공 부인이 함께 음식을 만들었다.”

  

# 명문에 대한 해설

    @ 등장 인물

      * 사부지 갈문왕(입종 갈문왕) : 법흥왕의 친동생이자, 진흥왕의 아버지가 되는데, 형인 법흥왕의 딸(즉 자신의 조카딸)인 지소(지혜시몰비)와 결혼함.

   사부지(입종) 갈문왕과 지소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심맥부지이다.

      * 심맥부지(삼맥종) : 사부지 갈문왕의 아들로서, 6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님(지혜시몰비)을 잃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왔는데, 이곳에 온 지 1년 뒤인 540년에 법흥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 24대 왕(진흥왕)이 되었다.

      * 모즉지태왕비 : 법흥왕의 왕비이자, 사부지 갈문왕(입종 갈문왕)의 형수이자 장모가 된다. 즉 심맥부지(훗날의 진흥왕)에게는 큰어머니이자 외할머니가 된다.

      * 아혜모홍 : 사간지 진육지의 처로서, 음식 만드는 일을 담당한 여자이며, 원명과 추명에 모두 등장한다. 즉 두 번 모두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갈문왕의 측근이거나 음식을 특별히 잘하는 요리사였던 듯하다.

    @  해설

      * 사부지 갈문왕은 이곳을 최소한 3번 방문하였다. 을사년(525년), 정사년(537년), 기미년(539년) 등이다.

       - 을사년 : 사촌 누이 등과 최초 방문. 음식을 해 먹고 즐김.

       - 정사년 : 아내(지혜시몰비)가 죽은 후 이곳을 방문, 아내와의 사랑의 추억에 잠김. 

       - 기미년 : 장모님을 모시고 6살짜리 어린 아들과 함께 방문하여 음식을 해먹었다. 

      * 유람길에 여성(누이, 장모)을 동반하고, 일을 도와준 여성들의 실명까지 기록한 것으로 보아, 여성들에 대한 배려가 상당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0. 주변사항

  * 각석의 건너편에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다수 있다. 대곡천 계곡 일대에는 수십 군데의 장소에 수백 개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 각석의 반대편 언덕에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주석했다고 하는 반고사 절터가 있다.

  * 가까운 곳에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가 있다. 

  * 포은 정몽주의 귀양과 관련한 유허비, 반구서원 등이 있고, 수많은 고분군과 가마터 등이 산재되어 있다.

  * 신라시대의 수레바퀴 자국 유적이 발견되었다.

  * 반구대 쪽으로는 암각화 박물관이 준공을 앞두고 있다.

  *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는 같은 대곡천을 끼고 있는 유적(천전리가 상류쪽임)으로서, 국토사랑 도보순례의 코스로 조성되어 있다.

  *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의 하류쪽에는 사연댐, 상류쪽에는 대곡댐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사연댐으로 인해 년 중 대부분은 물속에 잠겨 있어 훼손이 우려된다. 장마철 홍수 때에는 대곡댐의 방류에 따른 훼손(천전리 각석, 반구대 암각화)도 우려되고 있다.

  * 반구대 암각화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한 상태이다.

  *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은 명승으로 지정해도 좋을 정도로 경치가 좋고,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0. 뒷이야기

  * 천전리 각석으로 가는 길 입구 쪽에, 분위기에 맞지 않게 세워진 큰 건물은 사회복지시설인데, 몇 년 전에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곳이다.

   돈 몇 푼과 아들을 취직시켜준다는 미끼에 도장을 찍어준 이장은, 마을 사람에게 밤중에 도끼에 찍혀 죽었고, 이장을 죽였던 주민도 자살했다.

  왜 하필 국보가 있는 수려한 계곡 입구에 엄청난 건물을 짓도록 허가를 내주었는지 의문이다.

  * 천전리 각석은 한 때 주민들의 화장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평평한 암반 뒤로 넓고 긴 바위벽이 앞으로 약간 비스듬하게 있으니 불길의 단속에는 좋았겠지만, 이로 인해 일부 훼손이 되었다.

  * 천전리 암각화나 반구대 암각화의 발견에는 ‘이상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주민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가 1년의 시차를 두고 모두 크리스마스에 발견되었으니, 우연치고는 참 묘하다고 하겠다.

  

  ** ‘화랑세기(필사본)’에는 입종 갈문왕이 부인인 지소보다 먼저 죽은 것으로 나와 있어 각석의 내용과는 상반된다.

 



***  사진은 '전주산울림산악회' 카페에서 스크랩해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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