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서봉총의 슬픈 사연

道雨 2007. 12. 18. 13:09

 

 

 

 

                             서봉총(瑞鳳塚)의 슬픈 사연

 

 

 

 

                      

                       * 경주 노서동 고분군 전경 

 

 


  경주의 노동동노서동 고분군 안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신라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과 함께 이웃하여 서봉총이 있다. 발굴 전에는 높이 10미터 정도의 큰 고분이었다가 지금은 기념비만 휑하게 서 있지만, 이곳은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 치하인 1921년에 금관총, 1924년에 금령총에서 연이어 금관이 출토되었다. 신라 고분에서 찬란한 금관이 나오자 도굴꾼들이 경주로 몰려들었다. 총독부에서도 가만 둘 리가 없었다.

  1926년에 금관총과 이웃한 이 129호분(서봉총)을 발굴해 보니 금관이 또 나왔다. 그래서 총독부는 급히 본국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발굴을 중단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을 잡아먹은 상태였고, 아시아 침략 야욕에 불타고 있었기에 유럽과 우호 관계가 필요했다. 마침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은 스웨덴의 구스타프6세 황태자는 태자비 루이즈와 함께 일본에 신혼여행을 와 있었다. 이 절호의 기회를 일본이 놓칠 리 없었다. 황태자를 일본 황실에서는 이렇게 유혹했다.

  “신라 천 년의 고도 경주에서 금관이 나왔고, 지금 발굴 중인 고분에서도 금관이 나올 기미가 보입니다. 직접 발굴에 참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고고학에 상당히 조예가 있는 황태자가 배로 현해탄을 건너 부산을 거쳐 경주에 도착한 것은 가을이 성숙되어 가는 1926년 10월 10일이었다.

 

 

                 

                  *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의 발굴 당시 장면

 

  이때부터 중단되었던 발굴 작업이 다시 부산해졌다.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는데, 흙과 돌을 조금 걷어내자 황태자의 노란 머리보다 더 찬란히 빛나는 황금이 눈앞에 펼쳐졌다.

 

                   

                     * 보물 제339호 서봉총금관 

 

  황태자는 흥분했고 손은 파르르 떨렸다. 손이 떠는 만큼 금관에 붙은 영락과 옥도 떨리고 있었다. 황태자가 흥분하고 감동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일본 관리들은 만면에 웃음을 흘렸다. 저녁 술시(戌時)가 되었다. 경주 최부자집에서는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님이 무덤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음......”

  “황태자님이 발굴에 직접 참여하셨으니 서전국(瑞典國 : 스웨덴의 한문식 표기) 이름을 따서 서전총(瑞典塚)이 어떨지요?”

  순간 침묵이 흘렀고 들었던 술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면서 황태자는 말했다.

  “안됩니다. 찬란했던 동양의 나라 신라 왕릉에 서양 이름을 붙이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아까 보니 금관 정수리에 봉황 같은 새 세 마리가 붙어있던데 봉황총(鳳凰塚)은 어떻겠소?”

 

                                     

        * 서봉총금관의 옆모습, 정수리 부분의 가지 끝에 새(봉황) 세 마리가 앉아 있다.

 

 

 

  이 정도면 나이 어린 황태자지만 고고학적 지식과 안목에 겸손까지 갖춘 셈이었다. 난감해진 일본 관리들은 “봉황대라는 고분 이름이 있으니 봉황총은 곤란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서전국의 서, 봉황의 봉을 따서 서봉총(瑞鳳塚)이 된 것이다.


  출토된 금관과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등의 황금 유물들은 경성박물관으로 옮겨진다.

  1935년 10월 9일, 제1회 고적일을 맞은 평양박물관은 경성박물관 소장품을 특별 전시한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 고이즈미 평양 박물관장은 평양의 각 기관장들을 평양 기생집으로 초대하고, 전시 유물들을 몽땅 기생집으로 가져갔다. 고이즈미는 서봉총 발굴 책임자였기에 여러 모로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그는 평양 기생 차릉파의 머리에 서봉총 금관을 씌우고, 목걸이, 귀걸이, 허리띠를 채워준 뒤, 신라 여왕하고 술 마시는 기분으로 부어라 마셔라 했다.

 

  이 서봉총의 주인은 여자인데, 어느 왕비일까? 왕녀일까? 귀족일까? 애첩일까? 그가 누구였든 간에, 경주에서 무덤이 파헤쳐지고, 봉분마저 없어지고, 자신이 장식했던 유물들은 평양으로 가서 농락당한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인 셈이다.


             - 이재호의 ‘천년 고도(古都)를 걷는 즐거움’에서 발췌 -


 

                 

                 * 경주 노동리노서리 고분군 사진

 

 

*** 서봉총 관련 사항

 

  현재 경주시(慶州市) 노서동(路西洞)에 사적 제129호로 지정된 터만 남아 있다. 원래는 남북으로 연접한 표형분(瓢形墳)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1926년 건축공사로 남분은 이미 훼손되고 북분만 일본인 小泉顯夫 등이 발굴하였다.

  발굴당시 스웨덴의 구스타프황태자가 참관하였는데,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瑞典)의 서자를 따고 발굴시 출토된 금관에 붙어 있던 봉황형장식에서 봉자를 따서 ‘서봉총(瑞鳳塚)’이라고 명명하였다.

  발굴 전 이 고분은 주위의 건축물 때문에 원형이 훼손되어 남북장경 약 51.6m, 동서 약 34.5m, 높이 약 6.9m의 남북으로 긴 봉분이 남아 있었다고 하며, 발굴결과 봉분의 북쪽부분에 직경 약 36m로 추정되는 외부 둘레돌(護石)에 둘러 쌓인 동서로 긴 돌무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고분이 북분, 곧 서봉총이며, 이 북분의 외부 둘레돌의 남단일부를 파괴하고 또 다른 돌무지가 있었으나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 고분은 외부 둘레돌과 돌무지와의 관계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원래는 2기의 봉분이 남북으로 연접해 있었던 표형분이 분명하며, 북분의 둘레돌과 남분의 돌무지와의 연접관계로 보아 북분이 선축되고 남분이 후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3산입식금관, 금제귀고리, 금제허리띠일괄품 등 대규모 왕족릉급 고분에서 볼 수 있는 호화로운 유물들과 각종의 칠기류, 용기류들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들 가운데에는 이 고분의 축조연대와 관련하여 극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유명은제합(有銘銀製盒) 1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은제합은 십자형꼭지가 달린 뚜껑과 바닥이 편평한 바리모양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 은합의 뚜껑안쪽과 그릇의 바깥쪽 밑바닥에 ‘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라는 침각명이 있어 주목을 받았다.

  이 연호는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되고 있고 451년으로 여겨지는데, 451년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3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원년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고분의 연대는 은합에 보이는 연대보다는 조금 늦은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피장자는 여자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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