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금관에 대하여
지금까지 금관이 출토된 고분의 제작 시기는 대략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의 왕은 4명(눌지, 자비, 소지, 지증왕)뿐이고 금관은 6개나 나온 걸로 보아 왕보다 금관이 더 많은 셈이다.
총 6개의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출토된 곳과 출토시기는 다음과 같다.
금관총(1921년), 금령총(1924년), 서봉총(1926년), 교동 금관(1960년대 도굴된 것), 천마총(1973년), 황남대총 북분(1974년)
이들 6개의 금관 중 사슴뿔 모양의 천마총 금관이 가장 크고 화려하다.
* 국보 제87호 금관총 금관, 남성의 것
* 일제 치하(1921년) 때, 분위기 있는 봉황대 부근에서 주막을 하던 박씨라는 사람이, 장사가 잘 되어 주막집을 확장하기 위해 뒤뜰 언덕을 파다가, 금빛 찬란한 금관을 발견한 곳이 금관총인데, 이로써 우리나라 첫 금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보물 제338호 금령총 금관, 소년의 것
* 금령총 금관 : (금관 머리테 아래쪽에, 금방울(한자로 金鈴)이 달려 있어서 무덤 이름이 금령총이 됨)
무덤의 주인공이 15세 전후의 남자아이인데, 금관과 금제 장신구가 나온 것으로 보아 왕이 될 왕자가 일찍 죽은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작고 간단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다른 금관에서 볼 수 있는 비취 곡옥의 장식이 없다.
* 보물 제339호 서봉총 금관, 여성의 것
* 서봉총 금관 : 발굴 당시 스웨덴 왕자가 참관했다고 해서 '서'(스웨덴은 한자로 '瑞典' 이라 씀), 금관에 봉황장식이 있다 해서 '봉', 합쳐서 瑞鳳塚이라고 무덤 이름을 정했다고 함.
* 교동 금관, 소년의 것
* 교동(校洞) 금관 : 이 금관은 도굴 후 압수된 것이어서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없다. 다른 것들과 달리 매우 조잡한 형태여서 진짜 신라 금관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 국보 제188호 천마총 금관
*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1971년 청와대 주도로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이 수립되었을 때에는 대릉원에서 제일 큰 98호분을 발굴하기로 했다. 그런데 발굴 실력과 경험이 없어 그 옆의 155호분을 먼저 발굴하게 되었는데, 금관과 천마도, 허리 장식, 소뿔, 계란 등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나왔으며, 천마도가 나왔다고 하여 천마총이라고 명명하였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 중,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만 780여 점이나 된다.
* 국보 제191호 : 황남대총(98호분) 북분 금관, 여성의 것
* 천마총 발굴에서 경험을 얻어, 1973년 7월 6일부터 1975년 10월 8일까지 2년 3개월에 걸쳐 연인원 3만 2,800명을 동원하여 98호분(황남동에서 가장 큰 고분이라 하여 황남대총으로 불리우며, 북분과 남분의 쌍분으로 되어 있다)을 발굴하였는데, 남분에서 금동관 등 2,500여 점, 북분에서 금관 등 3만 5,00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남분에서는 60세 전후의 남자(눌지왕, 내물왕 추정)와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전후의 여자 유골이 나왔다.
북분에서는 금관이 나오고 은 허리띠에 부인대(夫人帶)가 있어 남편보다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자 유골이 나왔는데 15세 전후의 여자라서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천마총에서는 유물은 적지만 가장 화려한 금관에다 천마도까지 나와, 규모가 큰 황남대총은 그대로 덮어두고 천마총은 내부를 공개하게 되었다.
* 황남대총 발굴 모습
1. 역사적 사실
고대의 금관 하면 세계사적으로도 우리나라 외에는 그다지 내세울 나라가 없습니다.
1) 금관의 수 : 6개
금관과 금동관(금+구리로 만든 관)은 다르다. 금동관까지 포함하여 '금이 들어간 관' 은 꽤 많은 수가 발굴되어 있지만, 금관만 놓고 본다면 고작 6 개 만이 발굴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금관총, 천마총, 서봉총, 황남대총, 금령총, 교동 고분(미상) 등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신라유적에서 금동관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신라 유적에서도 금동관은 나옵니다. 예컨대 황남대총의 경우, 자그만치 6개의 금동관이 출토되었습니다.
2) 금관을 사용한 나라: 신라
금동관은 가야 유적이나 마한 유적으로 추정되는 전라도 남부 유적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금관은 모두 신라 유적에서만 나오고 있습니다.
3) 금관은 단순히 부장품에 불과했다
금관이 왕이 살아생전에 사용된 물건인지, 혹은 죽은 뒤에 죽은 자에게 씌어주는 물건(일종의 데쓰마스크 death mask )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금관총 금관에서 보이는 '실수' 는 금관이 죽은 자를 위한 부장품이라는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왼쪽 사진은 금관총 금관의 일부입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금으로 된 철사를 꼬아서 금조각이나 곡옥(비취)을 왕관에 달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인이 금관을 만들다가 실수로 잘못 뚫은 구멍들이 보이죠?
만약 이 관이 왕이나 귀족이 살아생전에 쓰던 물건이라면, 금관의 주인이 이 구멍들을 못 보았을 리 없고, 물건을 다시 만들게 했겠지요.
이런 물건이 그냥 묻힌 것으로 보아 이 금관은 평소에 썼을 가능성은 적고, 단순히 '부장품' 용으로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금관은 임금용이 아니다
잘못 알려진 사실 중 하나는 신라 금관은 '왕'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예컨대 황남대총의 경우, 황남대총은 남분(남쪽 무덤)과 북분(북쪽 무덤)으로 이루어진 쌍분인데, 여성의 무덤으로 보이는 북분에서 금관이 출토되었고, 임금일 것이 거의 확실한 남쪽 무덤에서는 금관이 나오지 않고 대신 금동관이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왕족 여성의 무덤으로 보이는 서봉총, 왕족 어린이의 무덤으로 보이는 금령총에서도 금관이 나온 것으로 보아, 금관은 임금용이라기보다는 고위 귀족용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5) 임금은 금관이 아니라 금동관을 사용
금동관이 금관보다 더 격이 높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황남대총에서 왕(남자)의 무덤인 남분에서는 금동관만 6개가 나왔지요. 이한상 교수는 금동관이 금관보다 격이 높으며, 금관은 시신의 머리 전체를 감싸는 데스마스크 형태로 출토된다는 점을 들어 금관은 단순 부장품(그것도 왕족용)이고, 금동관이야말로 임금이 실제로 사용한 관이라고 주장합니다.
2. 보존상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금관은 6개이고, 금의 성격상 부식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보존상태는 나쁘지 않습니다.
금동관까지 언급한다면,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도굴꾼으로부터 사들여 호암미술관에 있는 금동관이나 전라도 쪽에서 발굴된 금동관, 충청도 쪽에서 발굴된 백제의 금동관 등도 있습니다.
3. 금동관 출토 지역
참고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금동관이 출토된 지역은 부산, 양산, 창녕, 울산, 경산, 대구, 선산, 의성, 강릉, 파주, 고령, 성주, 나주, 합천, 단양 등으로, 주로 경남, 경북 지방이 많다.
*** 아래 사진은 신라의 금관이 아닌 것으로는 유일한 가야의 금관임.
* 경북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대가야의 금관 (호암미술관 소장) : 국보 제138호
*** 1963년 문화재 도굴범들이 대규모로 검거된 사건 당시에, 장물 문화재 대다수가 국립박물관에 접수됐지만, 대가야 금관으로 추정되는 관 등 일부 유물은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끝내 나타나지 않았던 이 금관은,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호암컬렉션'이 특별 전시될 때 모습을 드러내, 국보 138호로 지정됐다.
이 금관은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씨가 도굴꾼들로부터 구매했으며, 최종 구매자가 이병철 회장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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