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인용사터, 월정교터 답사 사진
* 2007년 12월 30일,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경주 지역 몇 군데 답사를 다녀왔기에 사진을 올립니다.
인용사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가 당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던 중, 외교를 위해 당나라에 갔던 김인문(태종무열왕의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이 당나라의 옥에 갇혀있게 되자, 김인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기 위해 신라 사람들이 지은 절이라고 한다.
지금 반월성의 남쪽(남천을 건너)에 인용사지라고 전해져 오는 곳이 있으며, 인용사 터에는 2기의 탑 잔재와 팔방대좌(八方臺座)의 지대석(址臺石)이 남아 있다.
인용사터는 현재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인용사터 발굴현장의 임시 담장에 그려놓은 그림과 안내문.
인용사의 정확한 위치가 기록에 없으며, 예전부터 이곳이 인용사터로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에 전(傳) 인용사지라고 하였다.
* 인용사터 발굴현장 모습.
인용사터에서는 지금까지 청동제 광명대(초와 등잔을 사용할 수 있는 등촉기구의 일종), 대형목제남근, 고배(굽다리접시) 등이 출토되었다.
* 인용사터 연못에서 출토된 청동제 광명대.
경주 전 인용사지 사역 내 서쪽 연못의 바닥에서 출토된 광명대는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높이 35cm이다.
등좌(燈座)는 세 방향으로 뻗은 짧은 동물 다리 위에 둥근 원반형 받침을 마련하였고, 원반의 중앙에서 곧게 뻗어 위로 오르는 대나무 마디 모양의 굵은 기둥이 연결되어 있다.
기둥 위에는 가장자리가 살짝 들린 형태의 둥근 접시(承盤)가 올려져 있는데 주석땜질로 결합된 것이 특징이다.
* 인용사터 발굴현장에서 바라본 월성
*** 김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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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교터에서 수집된 석재들.
* 월정교터 석축.
월정교는 남천을 가로질러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4개의교각을 가진 석조다리였으며, 목조건물 형태의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월성 쪽의 석축. 오른편 돌출된 부분 앞으로 교각의 흔적이 보인다. 교각 부위보다 석축이 훨씬 긴 것으로 보아 석축 위에 건물이 있었던 듯 하다.
* 물 속에 잠겨 있는 석재.
* 월정교에 있었던 4개의 교각 중 하나이다. 나머지는 흙 속에 묻혀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석축. 돌출된 부분(돌못)의 기능은?
* 2008년도에는 월정교 복원공사가 시작될 모양이다. 4개의 석조의 교각위에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을 가진 형태이다.
* 월정교 인근의 고가. 주변에 요석궁이 있고, 경주 향교와 최부자집이 있다.
* 월정교 석축 뒤로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 반월성이다.
* 반월성 쪽 석축 위에서 교각 기초 부위를 내려다 본 모습.
물살의 방향을 따라 위쪽과 아래쪽은 유선형으로 만들고, 돌과 돌(좌우, 상하)을 철골로 연결했던 흔적(홈이 파인 부분)이 보인다.
* 건너편 물가에 교각의 기초가 되는 석재의 모습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다.
* 반월성 쪽 석축 주변에도 수집된 많은 석재들이 있다. 사진 아래쪽의 기둥 모양 석재는 복원조감도 사진에 목조건물의 앞에 그려져 있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로 생각된다.
*** 원효와 요석공주, 그리고 설총
원효가 화랑이던 천춘시절 서로 사모하던 원효와 요석공주
그러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화랑들의 비무대회에서 우승한
진 여랑과 결혼한 요석공주 백제와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요석공주는
청상과부가 되어 외로운 세월을 보내다가
출가한 비구승이 되어 돌아온 원효를 때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때로는 먼발치에서 보게 되면서 날이 갈수록 사모의 정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 ‘저분은 스님이시다.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결심을 하고 출가하신
저 분을 내가 사모하면 안 되지.’ 그러나
원효의 잘생긴 모습과 탁월한 설법에 당시의 왕비와 요석공주는
원효를 짝사랑 하게 되고 왕비는 원효를 자주 왕궁에 불러들여 설법을 들었다
그러나 원효는 청춘의 첫사랑 요석과의 열정이 아직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으니
불교의 이론과 현실의 마음 작용 사이에서 일어나는
묘한 번뇌를 격고 있었으리라 사료 된다
요석공주 또한 아무리 다짐을 해도 원효가 불도 닦는 승려가 아니라
학식 높고 말 잘하는 미남자로만 자꾸 생각되고,
그리움이 사무쳐 병이 날 지경이 되었으리라.
공주는 용기를 내어 원효에게 모란꽃과 승려 복을 선물한다.
원효는 공주의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었다.
공주는 고민 끝에 자신의 이런 간절한 연모의 마음을 아버지 무열왕에게 말한다.
“아바마마.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제 눈에는 나무밖에 보이질 않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좋을 듯하옵니다.”
원효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주의 아름다운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승려였고 상대방은 공주였다.
두 사람이 결혼을 원하더라도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아마도 내면의 번뇌는 연민과 사랑 그리고 부처님의 계율과 승려로서의 명예 등 참으로 많은 것들 속에서 또 하나의 의문에 부딧졌으리라 여겨진다.
인간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곳에서 원효는 또 다른 세계와 만나게 된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남산의 거지 땡초 대안대사의 만남과
그 유명한 요석공주와의 3일간의 사랑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기록된 자료에 의존 하거나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통해 진실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우며 현실의 자기 삶 속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다
먼저 원효대사와 대안대사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원효대사가 왕궁에서 설법하고자 교자에 올라 왕실로 가는 도중에
대안대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남산의 작은 토굴에 사는
대안대사는 말 그대로 타락한 땡초의 모습이었다.
흔히 말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홀로도인인 것이다
원효는 왕실의 고승대덕이고.
대안대사는 중생들의 눈에는 타락한중 (땡초)의 모습이니
둘은 서로 극과 극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 원효가 가마를 타고 왕실로 가던 중.
대안 대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대안 대사는 술에 취해.거지꼴을 하고선.
원효대사에게.
부처님 말씀에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는데.
어떤 놈은 복이 많아 사람위에 사람이 타고 가며.
(사람이 가마를 태우고 가는 것),
좋은 옷을 걸치고 , 좋은 곳만 들락거리느냐…….
또 어떤 놈은 천지가 내 집이고. 내 법당이니.
걸림도 없고.막힘도 없으며.천지가 다 내 것인데
어떤 놈이 더 편한가. 어디 한번 해보자.
하며 고함을 치니 그 소리가
원효에게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로 들렸고.
다른 사람들은 술 먹은 미친 중놈의 미친 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원효는 자기 신분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날따라. 비가 부슬 부슬 내렸고. 왕실에가 설법을 하는데.
요석공주가 비에 옷이 젖어.속살이 살짝 들어다 보이는
요염한 자태로 앉아있었다. 순간적으로 동하는 자신을 보면서 잠을 설치고.
다음날. 원효는 대안 대사를 찾아 나섰다.
토굴 안에는 죽은 어미 곁에 오소리(호랑이) 새끼가 끙끙대며 슬피 울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 애처롭고 슬퍼서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해주고 있는데.
대안대사가 돌아와 목탁을 치고 있는
원효를 보며 뭐하는 거냐고 물으니
원효는 어미가 죽어 울고 있기에. 염불을 한다고 했다.
대안대사는 혀를 차며 쯔쯔쯔 …….
배고플 때 밥을 주는 것이 염불이니라…….
하며 아랫마을에서 동냥해온 젖을 물리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원효는 또 한 번. 대안에게. 매을 맞는 기분이었다.
아~하. 미친 승이 아니라.고승대덕 이로구나
원효는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 자초지종 자신의 얘기를 했다.
그러자 대한 대사는. 좋다. 좋다. 날 따라와라.
대안대사는 원효를 대리고 서라벌 (신라의수도)의
어느 대포 집에 들어가 여자 둘을 사이에 두고. 술을 마셨다.
원효는 술은 않먹는다.여자도.멀리한다. 하며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대안 대사.
진리를 가는 데는.
마음 따로 몸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니라.
극락을 갈려면. 추락을 맞보아야지. 극락을 가는 거야…….
원효에게.이래도 법에 걸리고.저래도 경계에 걸려서는 .
영원히 한발자락도 나갈 수 없을 것이야.
요석이 꾀거든.하루 밤을 보내고.
목탁을 쳐 주거라…….그리고 그걸 뛰어 넘어라…….
원효는 요석을 사모하는 마음과
이름 있는 승려의 신분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으리라
자극을 받은 원효는 답답한 마음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닌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라고 노래를 하였다
사람들은 원효가 거리에서 부르는 이 노래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무열왕은 원효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하. 마침내 내 자식이 대사의 마음을 움직였구나.
항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공주를 애석해 하던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대사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는
그런데 대사가 내 딸과 결혼하려고 과연 승복까지 벗을까?”
생각하던 무열왕은 어느 날 신하를 시켜 거리를 돌아다니는
원효를 찾아 요석 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한다.
신하는 어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다니다가
문천 교라는 다리를 지나고 있는 원효와 맞닥뜨린다.
그 신하가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던 원효는 신하의 모습이 먼 곳에서 보이자 짐짓 발을 헛디딘 체
문 천교 아래 냇물에 풍덩 빠진다.
요석 궁으로 보내진 원효의 젖은 옷을 갈아입힌 요석공주는
단 3일간의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
원효와 요석은 삼일 낮밤을 함께 했다. 삼일이 지나고 .
원효는 요석에게 얘기를 하고 떠나려고 하니.
요석공주. 원효대사 가슴을 만지면서. 어딜 가시든지.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고.넓은 이 가슴속에
티끌보다도 작은, 먼지보다도 적은 나를.
어느 한구석 기댈 되는 없는지요. 했다
원효. 있다도 없고 없다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더불어 나도 없는데. 그대가 어디 머물 자리가 있겠느냐?
요석은 원효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 후
단 3일간의 사랑으로 원효가 떠나가고.
요석공주는 . 배가 불러. 설총을 낳은 것은 655년에서 660년. 사이이다
후일 신라 십현의 한사람이며
우리 옛 문장 이두를 완성시킨 설총이라는 원효의 아들을 낳아.
원효를 바라보듯. 훌륭하게 키우며 먼발치에서. 몸을 숨기며.
소식을 듣고 보곤 했는데. 죽을 때까지 정식으로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원효는 한바탕 꿈이요. 허깨비 였구나 하면서
이름 모를 작은 절로 가서. 승복을 벗고
불목한이 되어 다시 행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수행을 했고.
경기도 소요산 자해암에서 수행중 깨친 것이.
한 생각 일어나면 만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하면. 만법이 멸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우치며 .
화엄경을 달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고.번역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긴다.
# '원효와 요석공주'는 '산외산인'님 블로그에서 스크랩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월정교터에서 상류 쪽으로 약 700m 정도떨어진 곳에 일정교터가 있는데, 다리의 구조가 월정교와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일정교는 '효불효교'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얽힌 전설이 있다.
신라 때, 아들 일곱을 둔 홀어머니가 그 아들들이 잠든 밤이면 냇물을 건너 외간남자를 만나러 다녔다.
아들들이 이 사실을 알고 서로 의논하기를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다니시니 다리를 놓아 드리자." 하고 돌다리를 놓았다.
이후 어머니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고 야행의 나쁜 버릇을 고쳤는데, 사람들이 이 다리를 일곱 아들이 놓았다고 해서 '칠성교'라고 했다고도 하고, 일곱개의 돌을 놓아 만든 다리이기 때문에 '칠성교' 또는 '칠교'라고 했다고도 한다.
또한 어머니에게는 효성스러운 행위이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가 되는 일을 한 것이라 해서 '효불효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무튼 사랑과 효행에 대한 사연이 얽힌 이 다리는, 그 후 자식 없는 여인이나 젖이 적은 여인이 이 다리에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고, 또 짝사랑으로 고민하는 여인이 돌에 빌면 상대방에게 그 뜻이 전달된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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