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경주 천관사터와 재매정 답사 사진 (2007. 12. 30)

道雨 2008. 1. 1. 12:34

 

 

 

                  천관사터와 재매정 답사 사진 (2007. 12. 30 )

 

*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의 생가에 있던 우물이 재매정인데, 지금은 김유신의 집터 일대를 통털어 재매정이라고 하고 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여러 집들에 둘러싸여 위치를 찾기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주변을 모두 정비하여 넓게 확 트인 공간이 쉽게 눈에 띈다.

  김유신과 천관녀에 관한 설화를 간직한 천관사터는 이번에 처음으로 답사하게 되었다.

 

  

 

* 재매정 일대가 정비되어 넓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건물의 주춧돌들이 보인다. 왼편에 보이는 담장 안에 우물과 비석이 있다.

 

 

 

* 이 우물이 재매정이다. 안에는 지금도 물이 고여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김유신조(金遺信條)를 보면, 김유신 장군의 부인을 재매부인(財買夫人)이라 하였는데, 재매정택(財買井宅)의 택호는 재매부인(財買夫人)에서 연유된 것이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태대각간개국공김선생유허비

   현재 재매정(財買井) 옆에는 유허비(遺虛碑)가 있는데,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오임신(五壬申 1872年)에 경주부윤(慶州付尹) 이만운(李晩運)이 쓴 것이다.

  김유신은 무인인데, '선생'이라고 호칭을 붙인 것이 뭔가 어색한 느낌을 준다.

 

 

* 재매정 담장내부 광경. 유허비, 우물, 건물터 초석이 보인다.  

 

 

* 재매정 옆에 있는, '사마소', '풍영정'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

  원래 월정교 북쪽 교대 위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건물(1741년)인데, 과거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라고 한다.  

 

 

 

 

 

 

 

* 밭 한가운데에 있는 천관사터.

  오릉의 동편에 있으며, 김유신의 본가인 재매정과는 남천을 사이에 두고 약 1km 가량 떨어져 있다. 앞에 보이는 산은 남산의 북쪽 끝자락인 도당산이다. 

 

 

 

* 천관사터의 석조물 유적 

 

 

 

* 팔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조 유적(대좌의 초석인가?) 

 

 

* 탑의 기단부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부분. 

 

 

* 천관사지 안내판.

  천관사지는 천원마을 회관에 주차하고(승용차 2-3대 쯤 주차할 공간 있음) 조금 걸어가면 된다. 마을 진입로는 매우 좁아 주의해야 하며, 마을을 지나쳐 더 들어가면 차를 돌리기가 어렵다. 

 

 

 

 

* 천관사터에서 재매정쪽을 바라본 모습. 우중간에 멀리 잔디밭 처럼 보이는 곳이 재매정이다. 재매정 옆의 사마소 건물 지붕이 보인다.

  천관사터는 현재 남아있는 터도 매우 쓸쓸하게 보이며, 찾아가는 길도 안내판이 적어 천원마을 주민에게 물어보고 가는 것이 좋다. 

 

 

* 김유신과 천관녀(天官女)설화

 

 신라의 태대각간 김유신이 젊었을 때 가까이한 천관이라는 여인에 얽힌 전설.

 

  김유신이 젊었을 때 한동안 친구들과 함께 술 파는 계집의 집에 드나든 일이 있었다. 유신의 어머니는 이것을 알고 매우 걱정하여 하루는 곁에 불러 앉히고 엄하게 훈계를 하였다. 그때 유신은 비로소 미몽에서 깨닫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그런 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유신은 놀이를 갔다가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타고 오던 말이 멈추어서 고함을 지르므로 벌써 집에 도착하였는가 하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 집은 자기의 집이 아니라 전날에 드나들었던 천관의 집이었다. 이것은 말이 전날에 다니던 집이라 길이 익은 까닭에 길가에 있는 천관의 집으로 잘못 들어갔던 것이다.

  유신은 노하여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찼던 칼을 빼서 말의 목을 내리쳐 죽이고, 말안장도 그 마당에 내버린 채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집 문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이 광경을 본 천관은 뜻밖에 이와같은 변을 만난지라 놀라 까무러쳤다가 얼마 후에야 정신을 차린 뒤 말없이 탄식하다가, 유신을 원망하는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 노래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와같은 유신과 천관 사이에 얽힌 사랑의 이야기는 민간설화로서 전하는 것이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김유신에 관한 기록에는 천관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권 41 열전 제1 김유신 상에 의하면 "유신이 화랑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장차 삼국을 병합할 웅지(雄志)를 품고 있었는데, 건복 29년(612)에 이웃나라의 침략이 날로 극심하매, 공이 더욱 비장한 마음을 품고 혼자서 보검을 들고 인박산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고 기원하기를 마치 중악에서 맹세하듯 빌었더니, 천관신이 빛을 내리어 보검에 영기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 천관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이때 천관신은 도가의 삼관신 즉 천관·지관·수관 가운데 하나를 말함인데, 두 명칭 사이의 관련성은 알 수 없다.

 

  한편, 천관이 죽자 유신이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집 자리에 절을 지어 천관사라 하였다 하며, 또한 자기가 탔던 그 말의 목을 내리쳐 죽인 자리를 참마항이라 불렀는데, 뒷날 사람들이 이르기를 김유신의 삼국통일의 큰 업은 그 참마항에서 움텄다고도 전하여진다.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간. 국어국문학자료사전)

 

  뒤에 김유신이 그녀의 옛 집터에 절을 짓고 그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라고 하였다. 이 절은 오릉의 동쪽에 있었다.
  뒤에 원성왕이 복두(邏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쓴 채,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들고 천관사의 샘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으로 미루어, 천관사는 신라 하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천관녀에 대한 설화 내용 중에서,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베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에는 대부분 일치하지만, 천관녀의 그 후 행적에 관해서는 여러가지가 전한다.

  자살했다는 설, 출가해서 중이 되었다는 설, 천관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설 등등...

  전남 장흥에는 천관산이 있고, 천관사라는 절도 있다. 김유신도 산신이 되어 천관산에서 천관녀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설도 있다.

  살아서는 함께 하지 못했던 천관녀와 김유신의 사랑을 하늘에서나마 실현시켜 주기 위해서, 재매정과 천관사지 일원에서는 매년 칠석날(음력 7월 7일)에 천관제를 지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