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道雨 2008. 1. 3. 14:09

 

* 요즘 읽고 있는 책 내용 중에서 마음에 드는 글이라 가려 뽑았습니다.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이 글은 서울 망우리 공원 묘원에 있는 어느 묘 앞에 새겨진 비문(碑文)이다. 이 무덤의 주인은 우리의 찻그릇, 깨어진 도자기 파편, 그리고 정담이 오갔던 상(소반)을 통해 이 땅과 한국 사람을 무작정 사랑했던 한 일본인이다.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우리말을 유창하게 사용하고 한복에 김치 먹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다. 자기의 장례비조차 남겨 놓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국인의 자식을 위해 장학금까지 내놓았던, 우리와 가장 친한 이웃이었다.

  전차 안에서 한국인으로 오해한 일본인이 자리를 비워달라고 말하자,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고 자리를 내 준 사람이다.

  31살의 한창 나이로 폐렴이 악화되자, ‘죽어도 한국에 있을 것이오. 한국식으로 장사를 지내 주세요.’라고 유언을 남겨 이웃의 한국인들이 서로 상여를 매겠다고 다투었다고 한다.    다쿠미는 일본 야마나시 현에서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23세의나이로 조선 땅을 밟았으며, 조선총독부 산림과 용원, 조선임업소의 평직원으로 17년간 일했다.

  ‘조선도자의 귀신’이란 평을 들은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를 통해 조선민예에 빠져 든 그는 수입을 쪼개 도자기와 소반을 틈틈이 수집했다. 우리의 소반과 장롱을 닦고 어루만지던 그는 민예품에서 고아하고 견고하고 지극히 편리한 굉장한 美를 발견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하고 단정한 자태를 지니면서도 우리 일상에 친숙하게 봉사하고 세월과 더불어 우아한 멋을 더해 간다. 공예의 올바른 표본이라 할 것이다.’

  미처 우리가 우리의 전통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남보다 먼저 알고, 느끼고, 또 몸과 마음으로 그 미와 하나가 된 인물이다.

  그는 우리의 민예에서 받은 미적 충격을 ‘조선도자명고’, ‘조선의 소반’이란 연구 자료로 펴내어 도자 연구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것은 전국의 흩어진 가마터를 두 발로 뒤지고 다녀서 얻은 결과로, ‘조선도자명고’는 한국 사람도 모르는 그릇 본래의 이름과 쓰임새를 자세히 정리한 책이다.

  그는 영원히 한국인이고 싶어 죽어서도 한복을 벗지 못한 것이었을까? 이문동에 있었던 묘를 1942년 망우리로 이장하기 위해 묘를 팠을 때다.

  ‘그는 단정한 조선옷을 입고, 동그란 로이드안경을 낀 묻힐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는 회고담도 있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시절, 우리 문화재를 마음껏 수집해 즐긴 악명 높은 일본인들 틈에서 다쿠미의 애정 어린 넋두리는 청량수와도 같이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 준다.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남의 흉내를 내느니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이는 공예의 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 고제희의 ‘우리 문화재 속 숨은 이야기’ 중에서 발췌 ---

     

 

***  마지막 귀절이 더욱 마음에 드는군요. 지금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남의 흉내를 내느니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이는 공예의 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