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다보탑 유물 일본에 있다"

道雨 2008. 1. 19. 11:10

 

 

 

                       "다보탑 유물 일본에 있다"

 

 

 



일제 강점기, 경주의 어느 탑에서 나왔다고 알려졌던 유물들. 당시 골동계의 큰 손이던 오쿠라가 가지고 있다가 1982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됐다. 최근 이 유물이 다보탑에서 1925년 발견돼 불법 반출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사진은 ①금으로 도금한 원통 모양 사리합 ②청동으로 만든 합 ③금동경함이다. /한정호 연구원 제공
  목간학회 '묵서지편 정밀분석 결과' 23일 논문 발표 '무구정광다라니경'은 고려때 석가탑에 넣은 것으로 확인 다보탑 중수기를 왜 석가탑에 넣었는지 학계 논란일듯

 

  경주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은 고려시대인 1038년에 넣은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경주 남산의 어느 탑에서 나왔다'고 알려졌던 사리장치 세트(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는 1925년 일제가 다보탑을 보수하면서 불법적으로 가져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1966년 석가탑에서 발굴된 '묵서지편(墨書紙片·키워드)'과 석가탑에서 실제로 발견된 유물을 정밀 분석한 결과다.

  한국목간학회(회장 주보돈)가 23일 동국대에서 갖는 월례발표회에서 최연식 목포대 교수와 한정호
동국대 경주캠퍼스 전임연구원은 묵서지편을 분석한 논문을 각각 발표한다. 두 학자의 결론과 논리적 근거는 상당 부분 같다.

◆다보탑은 1024년, 석가탑은 1038년에 고쳤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작년 10월 묵서지편이 석가탑 보수와 관련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최·한 두 학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발표를 반박하며 "묵서지편은 각각 1024년의 다보탑 보수기록과 1038년의 석가탑 보수사실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문제의 묵서지편은 4종류의 기록이 들어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024년 기록 두 종(佛國寺 無垢淨光塔 重修記와 重修形止記)과 1038년 기록 두 종(佛國寺 西石塔 重修形止記와 佛國寺塔 重修布施名公衆僧小名記)이다.

  일반적으로 탑을 보수할 때는 원래 탑 안에 있던 유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새 유물을 추가한 후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다. 같은 탑을 보수→재보수했다면, 1024년에 기록됐던 유물 중 중요한 것은 1038년 기록에 당연히 반복돼야 한다. 그러나 1024년 기록과 1038년 기록에 석탑 내에서 발견된 유물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

  1024년 기록은 ▲동에 도금한 합 ▲사리 8과 ▲순금 병 ▲도금한 함 ▲무구정경 1권 ▲무구정경 9편이 '원래' 있었으며 추가로 동으로 만든 용기와 각종 향(香)을 넣었다고 돼있다.

  반면 1038년 기록에는 ▲난초와 연꽃을 새기고 연꽃 대좌를 갖춘 금당(金堂=사리외함을 말함) ▲사리 47과가 안치된 녹색유리병 ▲목탑 15개 ▲향이 나왔다고 적었다. 보수 후 '추가품목'은 ▲은으로 만든 종 2개 ▲각종 향 ▲무구정광다라니경 1권 ▲보협인다라니경 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1966년 석가탑에서 실제로 나온 사리장치는 1024년 기록보다는 1038년 기록에 묘사된 물건들과 외형상 일치하는 듯 보인다.



  두 학자는 1024년과 1038년 기록에 보이는 탑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다르다는 점도 지적했다. 1024년 기록에는 앙련대(仰蓮臺·하늘을 향한 연꽃 모양 받침), 화예(꽃술), 사자 등이, 1038년 기록에는 초층, 하층, 중층, 상층 등이 적혀 있다. 그러나 거의 동시기에, 같은 사찰에서, 동일한 탑에 대해 이렇게 다른 표현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석가탑이 전형적인 신라의 3층탑인데 반해, 다보탑은 몇 층인지 말할 수 없는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사자와 연화석 등을 배치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출토 유물이나 석탑 외형 비교뿐 아니라 1038년 보수 기록에 '서(西)석탑'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을 보아도 1038년 기록은 서쪽에 있는 석가탑 보수 기록이며, 1024년 기록은 동쪽에 있는 다보탑 보수 기록이라는 것이다.

◆다보탑 유물, 도쿄박물관에

  경주 지역 옛 주민들은 일제가 1925년 다보탑을 보수할 때 한국인의 접근을 차단한 채 극비리에 진행했으며, 많은 보물이 나오자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정호 연구원은 묵서지편 1024년 기록에 언급된 사리장치 유물과, 일제 강점기 골동품의 큰손으로 불렸던 오쿠라(小倉)의 소장품(현재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중 '경주 남산의 어느 탑에서 나왔다는 유물 세트'의 목록이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가령 순금으로 된 병(금 사리병), 동에 도금한 합(금동원통형사리합), 도금한 함(금동경함), 동으로 만든 용기(청동합) 등이 그것이다(괄호 안이 오쿠라 목록).

◆무구정경은 고려 때 넣었다

  묵서지편에 등장하는 무구정경은 ▲두루마리로 된 것 1권과 9조각(1024년 기록) ▲두루마리로 된 1권(1038년 기록)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024년에 기록된 무구정경은 '석가탑을 처음 만들 때 넣었던 것'으로, 1038년 기록에 언급된 것은 당시 석가탑을 보수하면서 새로 넣은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1966년 석가탑 보수 때 무구정경은 두루마리 1권만이 나왔기 때문에 문제다. 이 때문에 중앙박물관은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경이 1024년에 언급된 것인지, 1038년에 언급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제작 시기 역시 통일신라와 고려 중 어느 하나로 못박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한 두 학자에 따르면, 1024년 기록은 다보탑 보수 기록이므로 1966년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경 1권'은 당연히 1038년에 넣은 것이다. 그것이 실제 발견 상태와도 맞다. 따라서 석가탑 발견 무구정경도 1038년에 새로 넣은 것이다. 다만 두 학자는 "
통일신라시대 것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1038년에 넣었다고 볼 수도 있다"고 했다.

◆다보탑 중수기가 왜 석가탑에 있을까?

  23일 발표 때 토론을 맡은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도 "두 연구자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왜 다보탑 중수기를 석가탑에 넣었는지 ▲1024년 기록에 보이는 무구정경이 오쿠라 소장품에는 왜 없는지 등은 미지수다.
  최·한 두 학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중간발표 때 판독문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석가탑에서 발견된 1024년 기록도 사실은 사찰에서 보관 중이던 1024년 기록을 1038년에 베껴 적은 뒤 넣은 것"이라며 "석가탑을 1038년 보수하면서 그보다 앞서 벌어진 다보탑 보수 공사를 참고했음을 알리기 위해 넣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묵서지편(墨書紙片)

  1966년 석가탑에서 발견된 금동제 사리외함(外函)의 바닥에 놓여 있었다. 발견 당시 종이가 떡처럼 뭉쳐져 있어서 '먹 글씨를 쓴 종이 조각'이라는 뜻의 묵서지편으로 불리게 됐다.

  발견 이후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했다. 그간 학자들은 석가탑이 서기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뒤 한 번도 보수한 적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금동제 사리외함에서 나온 무구정광다라니경도 8세기 중엽 이전에 만든,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로 여겼다.

  1990년대 들어 국립중앙박물관은 묵서지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지만, '석가탑을 고려 때 고쳐 세웠다'는 기록이 보이자 비밀에 부친 뒤 연구를 중단했다. 2005년 9월,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해 3월 9일 본지가 묵서지편 내용을 근거로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제작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보도하자, 발견 41년 만에 본격적인 판독 작업에 들어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해 10월 28일 묵서지편 판독문을 전면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