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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난중일기 도난 사건

道雨 2008. 1. 17. 16:27

난중일기 도난 사건

 


1967년도 한해가 저물어 가는 마지막 날 밤, 연말의 들뜬 분위기를 틈타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현충사 사당 옆 유물관 진열장 안에 보관되어 있던 난중일기를 범인들이 야음을 틈타 침입하여 철판으로 된 출입문을 부수고 훔쳐간 것이다.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국보76호 문화재는 충무공이 진중에서 쓰신 7권의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서간첩 등 모두 9권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정치 군사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난중일기라는 명칭은 정조의 명으로 간행된 이 충무공전서에 충무공의 일기가 난중일기라는 이름으로 편찬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의 현충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과 지시에 따라 성역화 사업을 한창 진행 중에 있었던 터라 치안국에서는 사태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직접 수사관을 파견하여 수사하게 되었는데 초기에는 인근 주민의 단순절도행각으로 추정하여 부근의 우범자와 지역주민들을 용의선상에 놓고 수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충무공 후손인 이모씨 형제들이 용의 선상에 올라 모진 고문을 받는 등 주민들의 고초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훔치지 않은 난중일기가 나올 리 만무했다.

수사가 답보 상태에 이르자 대통령은 1968년 1월 8일 문화재 도난에 따른 전례 없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1월 17일까지 난중일기를 찾지 못하면 전 수사기관을 동원하여 범인을 체포 엄벌하겠으며 범인 스스로 뉘우쳐 자수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면 그 죄에 대해서는 일체 불문에 붙이고 난중일기의 행방을 알려주는 시민에게는 특별상금을 주겠다.”는 강경과 회유책을 발표했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한 다음날인 1월 9일 부산시경국장실로 어린학생의 전화 1통의 신고가 들어왔다. 신고를 접한 부산시경은 수사대를 긴급 투입하여 난중일기가 일본으로 반출 직전에 원형대로 회수하고 범인 일당 6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는 도난당한 날에부터 10일 만이며 신고자는 공범의 조카로 밝혀졌다.

경찰은 주범 유근필(柳根弼. 무직, 당시 37세 / 전직 중학교 교감 출신 )과 공범 이남출 등 일당 6명을 검거하고 한 명은 수배하였다고 발표했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주범 유근필은 1967년 12월 25일 부산 시내 모 다방에서 강찬순, 박훈태, 정선찬 등 세 사람과 만나 "이순신 장군의 유품을 훔쳐 내 오면 4백만 원 정도의 돈벌이가 된다"며 범행을 모의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 그는 하수인 이남출과 정선찬을 현지 답사차 온양에 보냈다.

현장 답사를 마친 이들은 28일 부산으로 되돌아와 29일 국제시장에서 범행에 필요한 드라이버 등 도구를 구입하고 30일 오후 1시 다시 온양으로 갔다. 이들은 현충사로 직행, 뒷산에 숨어 있다가 31일 새벽 경내에 잠입하여 난중일기를 훔친 후 1월 1일 오전 부산에 도착하여 주범 유근필에게 난중일기를 건넸다.

난중일기를 손에 넣은 주범 유근필은 이웃에 사는 강찬순에게 보관하도록 시킨 뒤 골동품상이자 장물아비인 허세조와 박훈태를 만났고, 일본으로 가는 배가 나오는 대로 박훈태가 이를 일본에 가져 가 1천만 원 정도에 팔아 나눠 갖기로 약속하였다.

주범 유근필은 강찬순의 집에 두었던 난중일기를 6일 오후 6시쯤 다시 인쇄업자인 이일환의 집 창고로 옮겨 보관하던 중이었는데, 이 단계에서 범인 일당이 검거되었다. 검거당시 난중일기는 비닐로 포장되어 고추장 항아리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난중일기는 고추장으로 위장되어 일본으로 유출 직전에 되찾은 셈이다.

주범 유근필은 모 대학 사학과 졸업생으로 한때 여자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다가 부산의 모 중학교에서 교감까지 지낸 인물로 문화재에 관한 안목이 높았다고 하며 그는 이미 1963년 4월 15일 서울 봉은사에서 보물 312호로 지정된 '고려청동루은향로'를 훔치고, 또 양산 통도사 소장 국보를 절취한 죄로 징역 10월을 복역했던 사실이 밝혀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결국 천안지검에서 당시 최고징역인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난중일기는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헬기로 공수되고 당시 문교부장관이 대통령으로부터 받아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하였다가 이후 현충사 유물관으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도난사건에 자극 받은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난중일기 영인본(影印本) 50질을 제작하여 관련 기관 등에 나누어 보관토록 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40년 만에 이순신기념관을 건립(2008 - 2010 / 3년간 )하여 전시할 수 있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이항원>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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