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호우총(壺杅塚) 발굴 관련
* 경주의 노서동 고분군 안에는 호우총이 있다.
* 호우총은 현재 봉토가 걷혀진 채로 평평한 모습으로 있다.
해방 직전인 1943년 4월 3일, 경주 읍내 노서리에 사는 김씨는 정원 앞바닥에서 호박을 심다가 우연히 장신구 10여 점을 발견했다. 호우총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당시 총독부 박물관은 아리미쓰를 급파했으며, 순금제 목걸이 33개와 곡옥, 관옥, 환옥이 달린 목걸이, 순금제 귀고리 등 수십여 개의 유물을 수습했다. 이런 인연 덕분에 이 고분이 해방 후 첫번째 발굴조사 후보로 꼽힌 것이다.
1946년 5월에 시작된 호우총의 발굴은, 광복 후 최초의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이란 점 외에도, 발굴주관은 우리나라가, 발굴지도는 일본인이, 발굴장비와 발굴비용은 미국이 각각 담당한, 최초의 국제적 발굴이었다는 의미가 있었다.
발굴조사를 시작한지 12일째 되던 1946년 5월 14일, 1,500여 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명문 청동항아리가 발굴대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호우총 출토 청동항아리의 밑면에 새겨진 명문. 중앙상단에 # , 좌하단에 十의 문양이있다. 이 두 문양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그러나 발굴 후에도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었으므로, 출토된 청동 항아리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호우(壺衧)'라는 글자를 기념해서 '호우총'이라 이름지어졌다.
경주의 신라 무덤인 호우총에서 고구려 유물, 그것도 고구려 정복왕이었던 광개토대왕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이 청동항아리 밑바닥 뒷면에 새겨진 명문의 글씨체는, 중국의 지안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글씨와 너무도 흡사했다. 마치 동일인의 필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비슷하다. 이로 인해 발굴보고서는 그 청동기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에 운반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412년에 죽고 난 지 3년 후가 되는 해로서, 서기 415년에 해당되며, 따라서 이 청동항아리가 415년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했다. 다만 누가 이항아리를 가져와 이곳에 묻었는지가 수수께끼였다.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왕자였던 복호(19대 눌지왕의 동생이기도 하다)는 광개토대왕 시절이던 412년, 인질의 신분으로 고구려에 가있다가 7년만인 418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고구려의 장례 풍속에 따라 광개토대왕의 3년상을 치루고 난 후, 신라로 돌라가는 복호에게 기념으로 이 청동항아리를 주었고, 복호가 죽고난 후 그의 무덤에 함께 묻어준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을 통해 연구한 결과, 무덤이 마련된 시기는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데, 복호는 5세기 전반의 사람이라 약 1세기의 시차가 있어 의문이 되고 있다.
출토된 청동항아리는 5세기 전반의 것이니 어찌된 영문인지 아직도 명확하지가 않다.
* 호우총 출토 청동항아리의 전체 모습
*** 뒷 얘기
발굴이 끝난 뒤 발굴 책임자였던 김재원은, 패망 이후에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호우총을 발굴한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를 지프에 태워 부산 부두까지 태워주었다.
아리미쓰는 그 이후에도 교토대 고고학과 주임교수를 역임하는 등 요직을 거쳤으며, 특히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의 환대를 받는 몇 안되는 일본인이었는데, 1967년 방한 때에는 때마침 회갑을 맞아 우리 측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기도 하였다.
-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미스터리'에서 발췌함-
*** 복호, 미사흔, 박제상 이야기
# 박제상 설화(朴堤上說話)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에 관한 설화. 박제상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자를 구한 뒤 자신은 죽음을 당한 인물전설이다.
그의 아내가 기다리다가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아내의 죽음 설화도 포함된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되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 보해(寶海 : 삼국사기에는 卜好)를 구하러 변복을 하고 가서, 왕의 추격을 무릅쓰고 같이 탈출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다음에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왕제 미해(美海 : 삼국사기에는 未斯欣)를 구하러 가서 신라를 도망해 왔다고 하며 왕의 신임을 얻은 뒤에 미해를 탈출시키고 자기는 붙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일본 왕의 문초와 설득에도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녹을 먹지 않겠다.”라는 말로 계림 사람임을 주장한 뒤에,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운 채 불타 죽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등장인물의 이름에 차이가 있고, 왕제의 부하 이름이 ≪삼국유사≫에는 보이지만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사실상 부사(副使)가 따라간 것을 밝힌 것도 되고, 박제상이 귀환 활동을 할 때 협조를 얻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귀국할 수 있게 설정한 것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왕을 설득하였더니 순순히 왕제를 풀어 주었다고 하여 박제상의 언변을 중시하였고, ≪삼국유사≫는 야간 탈출을 하였다고 해서 담력과 지혜를 중시하였다.
두 기록 다 박제상이 집에 들르지 않고 즉시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것은 부부나 가정의 정보다 국사가 더 중요하다는 박제상의 충성심을 드러내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함께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 문헌은 박제상의 사실(史實)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민간설화 측면에서는 박제상 부인 편을 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남편이 집을 떠나자 몸부림쳐 울었고(그래서 望德寺 앞 모래톱을 長沙라고 함.), 만류를 뿌리치고 다리를 뻗고 울었고(그래서 그곳을 伐知旨라 함.), 일본에 간 남편을 치술령에 올라가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치술령 신모(神母)가 되었으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설화적인 증거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
박제상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는데, 그곳의 주민은 아직도 부인의 정렬을 칭송하고 있다 한다. 다른 구전으로는 박제상의 아내는 죽어서 ‘치’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던 세 딸은 ‘술’이라는 새가 되었다고 한다.
또 이들이 떨어져 죽은 치술령고개 밑에는 은을암(隱乙庵)이 있는데, 이 암자는 절벽에 떨어져 죽을 때 새〔乙〕가 되어 숨어서〔隱〕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부인과 딸이 죽어서 새가 된 것은 새에게는 멀리 날아가서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날개가 달려 공간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새라면 바다를 건너가서 남편과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으련만……하고 간절히 바라던 것이 사후에 새로 변신하여 성취되었다.
죽음을 초월하면서 사랑은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며, 살아서 바다 건너로 떠날 수 없는 한을 죽어서 새가 되어 풀고 만난 점에서 한국인의 애정관이 절절히 표출된 것이다. 딸이 아버지를 만나려고 새가 된 것도 죽음을 건너 이어지는 부녀간의 사랑이다.
이때 은을암은 박제상 처자를 모시고 기념하던 당으로서 망부석과 같은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치술령의 산신이나 신모가 된 것은 주민이 박제상 부인을 존경하는 마음과 신앙심이 강조된 현상이며, 산신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당이 지어진 것이다.
이 설화에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충성심에 박제상 자신과 그의 아내와 딸의 인간적인 고뇌를 근거로 한 애정·정렬·효도 등의 복합적인 윤리관이 들어 있다. 구전설화 쪽이 더 인간적이며 가정적인 것은 물론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韓國口碑傳說의 硏究(崔來沃, 一潮閣, 1981), 朴堤上說話論(蘇在英, 국어국문학 통권53호,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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