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무책임한 아버지 (김삿갓)

道雨 2008. 7. 31. 15:58

 

 

 

무책임한 아버지

김삿갓의 아들이 본 아버지


불쌍한 우리 아버지, 오랑캐의 말은 북풍에 몸을 의지하고, 월(越)나라 새도 남쪽으로 둥지를 튼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아버지는 무턱대고 가출하여 무궤도의 방랑으로 전국을 떠돌아 다녔을 뿐입니다.

더욱이 스스로 죄인이라며 죽장에 삿갓을 써 세상에서는 ‘방랑시인 김삿갓’이라 부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둘째 아들 김익균(金翼均)이라 합니다.

영국의 윈저(1894-1972) 공작은 ‘세기의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심프슨과의 사랑을 위해 왕위까지 박찬 로맨티스트이지요. 로맨티스트라면 응당 자기의 꿈을 믿고 삶을 찬양하며 사랑에 충실하여야 해요. 차가운 리얼리스트는 자기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지 못해요.

1977년 [토요일 밤의 열기]에 출연한 미국의 영화배우 존 트래볼타를 기억하실 거여요. 그는 송아지처럼 맑은 눈으로 유들유들하되 전혀 느끼하지 않은 몸짓으로 영화 [펄프 픽션]에서 춤을 추었어요. 그를 바라보면 인간미 풍성한 여유와 유머에서 마치 자신의 참 모습을 보는 것같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잖아요.

도시생활에 찌든 현대인은 아버지를 보히미언이라 여기며 부러워하지만 어머니를 모신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아버지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인생도 아름답게 만들지 못했고 또 세상도 밝게 비추지 못하면서 어머니만 아프게 한 못된 사내지요.

또 저희 두 형제는 ‘아빠 찾아 삼만리’ 격으로 가출한 아버지를 허구헌날 찾아 다녔으니, 그 과정에서 제대로 배우지를 못해 인생까지 망쳤어요. 증조 할아버지를 욕한 것이 뭐가 대단한 잘못이라고 할머니를 비롯하여 우리 가족을 내팽개치고 도망을 가요. 죽은 사람이 중해요, 산 사람이 중해요.

1994년 5월, 재산을 물려받으려고 잠을 자던 한약상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흉기로 난자해 살해하고는 범행을 숨기려고 불까지 지른 박한상같은 놈도 있는데 말이어요.(‘95. 8.25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 순전히 핑계라고요. 가장의 가출로 인해 가족이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원망이 저절로 나와요.

미운 아버지, 나쁜 아빠!

아버지가 가출하게 된 이유는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에, 술에 취한 증조부(김익순)가 반란군에게 항복한 일 때문이래요. 당시 증조부는 선천의 방어사였는데, 항복한 죄로 참형을 받아 우리 집은 졸지에 명문가에서 폐족(廢族)으로 변해 버렸어요.

할머니는 세상의 멸시와 학대를 피해 낙엽처럼 떠돌았고, 마침내 인적이 드문 영월로 찾아들었지요. 우리 아버지는 스므 살 되던 해에 영월 백일장에 응시했는데 서당을 다닐 때부터 대단한 수재였대요.

시험 문제는 ‘정시의 충정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임을 통탄하라.’였어요.

정시는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반란군의 손에 죽은 사람이래요.

집안의 내력을 모르던 아버지는 귀신 뺨 때리는 솜씨로 김익순을 준엄하게 꾸짖어 장원급제했어요. 그러나 할머니는 기뻐하기보다는 조상을 욕보였다며 아버지를 호되게 야단쳤어요.

아버지는 역적의 자손이요, 조상을 욕보인 패륜아(悖倫兒)임을 알고 할머니, 어머니 황씨(黃氏), 형님 학균(翯均)을 버려두고 야간에 도망을 친 겁니다.

당대의 문장가나 풍류객 치고 명산대천을 유람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들은 대개 심신의 피로를 풀고 낭만을 찾던 휴식의 방랑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만큼은 속죄의 길이요, 이쪽 저쪽에서 우는 산새만이 깊은 슬픔을 달래 주는 번뇌의 나그네 길이었어요.

아버지가 읊은 시는 가수 최백호가 부른 ‘낭만을 위하여’가 아니라 대부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밥 벌이 수단에 불과해요.

금강산에서는 어떤 스님과 이빨을 걸고 시 짖기 내기를 해 스님을 합죽이로 만들더니 집 나간 지 4년이 지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제가 만들어졌고 또 방랑벽이 도져 훌쩍 떠났습니다. 흐으흑, 저의 괴로운 ‘아빠 찾아 삼만리’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심부름 중에서 가장 짜증나고 하기 싫은 것이 무엇인 줄 아세요. 바로 술집 혹은 노름방에 계신 아버지를 데려오는 심부름이지요.

순전히 아버지와 어머니간의 문제에 애매한 자식을 끌어들이는 처사며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또 아버지는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거나 돈만 잃으면서 무엇 때문에 죽치고 앉았는지 보면 볼수록 속에서 열 불이 나요.

“아버지, 엄마가 오시래요.” 하면 “알았다. 곧 간다” 하고는 외박하기 일쑤지요. 나중에는 꾀가 늘어, “아버지,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요.” 하면 그 때서야 “뭐야.” 하며 나오시지요.

그런데 밖에 어머니가 서 계시면 속은 것을 아시고 마치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까지 흘기셨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고, 이 인간 때문에 내 못 산다. 못 살아.” 하며 꼬집고 비틀어 끌고가서는 밤새 싸움을 하셨어요.

두 분의 문제로 귀한 자식 놈은 한 잠도 못 잤어요. 아, 졸려. 불쌍한 저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를 찾아 나섰어요. 아버지를 잘못 둔 덕분에 자식이 생 방랑을 한 거지요.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탐관오리가 득실거리는 시대였어요. 누가 거지같은 저에게 밥을 제대로 주겠어요. 배에서는 언제나 꼬르륵하며 소리를 나고, 헛간에서만 자도 그 날은 특급 호텔에서 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사진도 몽타주도 없이 사람을 찾는 일은 세상에서 무진장 힘든 일이여요. 처음에는, “이렇게 저렇게 생기고 나이는 어느 정도인 사람을 아느냐?” 라고 물었어요. 그러면 대개 모른다는 거여요.

그래서 나중에는, “시 장사를 아세요?” 라고 물었어요. 아는 사람들이 좀 있더라고요. 아버지를 장사꾼으로 몰아붙인 것이 한편으론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겨울이면 훈장을 지내면서 등 따뜻하게 주무셨고, 시를 밑천으로 술까지 얻어 잡수시며 유유자적하게 떠돌아다녔어요.

함경도에서는 가련(可憐)이란 기생과 아예 살림까지 차렸다는 스캔들이 나돌았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니 너무 야속하고 억울해 엉엉 울어버렸어요.

드디어 저는 계룡산 아래에서 아버지를 극적으로 체포했어요. 무조건 바지를 붙잡으며 제발, 오 제발 집으로 가자고 졸랐지요. 엉엉 울며 더 이상 자식을 고생시키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제가 잠을 든 틈을 타 줄행랑을 놓았어요. 으, 미운 아빠!

저는 그 후 1년을 또 다시 아버지를 찾아 다녔고, 경상도에서 다시 체포했어요. 수갑이 없던 시절이고 아버지라 차마 포승까지는 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지난 일을 거울 삼아 절대로 잠을 자기 않았어요. 한번 속지 두 번 속을 제가 아니지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 놓고서 도망을 쳤어요. 으, 못된 아빠!

아버지는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자식 놈 속이는데 만 써먹었어요.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또 찾아 나섰는데 자그만지 3년이나 지나서 진주에서 만났어요.

그런데 늙으신 아버지를 보니 원망보다는 눈물이 비오듯하더군요. 머리에는 흰 눈을 두집어 쓰고 몸은 깡마른 노인이었어요.

저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고, 이제는 잠도 자지 않고 심부름도 가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그 때서야 체념한 듯 순순히 저를 따라 영월로 향했어요.

그런데 아뿔싸, 방심은 금물이라 더니 큰 일을 본다기에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똥누려 갔다가 도망을 쳤어요. 황당!

그 뒤로 몇 년이 흘렀고, 전라도 동복 땅에서 아버지가 숨을 거두었다는 전갈이 왔어요. 즉시 달려간 저는 아버지의 시신을 껴안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했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를 영월의 태백산 기슭에 모셨어요.

지게에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2천리 길을 걸어갔다면 상상이 가겠어요. 세상이 허망하고 원통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겠어요.

허송세월을 보낸 저는 평창에서 훈장 노릇이나 하며 슬하에 택진(澤鎭)과 영진(榮鎭)을 두었고, 택진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눈을 감았어요. 그러자 택진이는 나무를 해 팔아 동생을 서당에 보내더니, 영진이는 강원도 건봉사(乾鳳寺)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어요.

영진이는 비록 스님이나 용모도 준수하고 똑똑해 고종 황제는 김삿갓의 후손임을 아시고 벼슬을 내려주었어요. 그래서 홍천 군수를 거쳐 경흥 부윤까지 올랐지요.

그런데 경술국치가 있자 영진이는 벼슬을 버리고는 여주에서 양조장을 경영했어요. 돈을 많이 벌었어요. 손자 경한(景漢)이도 양평에서 사업을 벌여 초대 도의원을 지내며 지방 유지로 행세를 해 가문의 이름을 빛내더니, 운이 없었던 지 사업이 기울고 중풍까지 겹쳐 1977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아, 돌이켜 생각하면 인생살이란 모두 헛되고 뜬 구름 같아요. 끝으로 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인 삿갓에 대하여 친히 읊은 시를 소개할까 해요. 삿갓은 오랜 세월을 두고 방랑의 동반자였지요. 햇볕도 가려 주고, 비가 오면 비옷도 되고, 부끄러운 하늘까지 가려 주었으니까요.

 

떠도는 내 삿갓 빈 배와 같아/ 어느 덧 사십 평생을 함께였네
목동이 들로 갈 때 차림이고/ 늙은 어부 갈매기와 벗할 때 모습이네
취하면 나무에 걸어 놓고 꽃 구경하고/ 흥이 일면 손에 들고 다락서 달구경하네
세상 사람 의관이야 겉치레지만/ 비 바람 가득해도 걱정 없기는 삿갓 때문이네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