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한 아버지 | |
김삿갓의 아들이 본 아버지 더욱이 스스로 죄인이라며 죽장에 삿갓을 써 세상에서는 ‘방랑시인 김삿갓’이라 부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둘째 아들 김익균(金翼均)이라 합니다. 1977년 [토요일 밤의 열기]에 출연한 미국의 영화배우 존 트래볼타를 기억하실 거여요. 그는 송아지처럼 맑은 눈으로 유들유들하되 전혀 느끼하지 않은 몸짓으로 영화 [펄프 픽션]에서 춤을 추었어요. 그를 바라보면 인간미 풍성한 여유와 유머에서 마치 자신의 참 모습을 보는 것같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잖아요. 또 저희 두 형제는 ‘아빠 찾아 삼만리’ 격으로 가출한 아버지를 허구헌날 찾아 다녔으니, 그 과정에서 제대로 배우지를 못해 인생까지 망쳤어요. 증조 할아버지를 욕한 것이 뭐가 대단한 잘못이라고 할머니를 비롯하여 우리 가족을 내팽개치고 도망을 가요. 죽은 사람이 중해요, 산 사람이 중해요. 아버지가 가출하게 된 이유는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에, 술에 취한 증조부(김익순)가 반란군에게 항복한 일 때문이래요. 당시 증조부는 선천의 방어사였는데, 항복한 죄로 참형을 받아 우리 집은 졸지에 명문가에서 폐족(廢族)으로 변해 버렸어요. 할머니는 세상의 멸시와 학대를 피해 낙엽처럼 떠돌았고, 마침내 인적이 드문 영월로 찾아들었지요. 우리 아버지는 스므 살 되던 해에 영월 백일장에 응시했는데 서당을 다닐 때부터 대단한 수재였대요. 정시는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반란군의 손에 죽은 사람이래요. 집안의 내력을 모르던 아버지는 귀신 뺨 때리는 솜씨로 김익순을 준엄하게 꾸짖어 장원급제했어요. 그러나 할머니는 기뻐하기보다는 조상을 욕보였다며 아버지를 호되게 야단쳤어요. 아버지는 역적의 자손이요, 조상을 욕보인 패륜아(悖倫兒)임을 알고 할머니, 어머니 황씨(黃氏), 형님 학균(翯均)을 버려두고 야간에 도망을 친 겁니다. 당대의 문장가나 풍류객 치고 명산대천을 유람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들은 대개 심신의 피로를 풀고 낭만을 찾던 휴식의 방랑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만큼은 속죄의 길이요, 이쪽 저쪽에서 우는 산새만이 깊은 슬픔을 달래 주는 번뇌의 나그네 길이었어요. 금강산에서는 어떤 스님과 이빨을 걸고 시 짖기 내기를 해 스님을 합죽이로 만들더니 집 나간 지 4년이 지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제가 만들어졌고 또 방랑벽이 도져 훌쩍 떠났습니다. 흐으흑, 저의 괴로운 ‘아빠 찾아 삼만리’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순전히 아버지와 어머니간의 문제에 애매한 자식을 끌어들이는 처사며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또 아버지는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거나 돈만 잃으면서 무엇 때문에 죽치고 앉았는지 보면 볼수록 속에서 열 불이 나요. “아버지, 엄마가 오시래요.” 하면 “알았다. 곧 간다” 하고는 외박하기 일쑤지요. 나중에는 꾀가 늘어, “아버지,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요.” 하면 그 때서야 “뭐야.” 하며 나오시지요. 그런데 밖에 어머니가 서 계시면 속은 것을 아시고 마치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까지 흘기셨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고, 이 인간 때문에 내 못 산다. 못 살아.” 하며 꼬집고 비틀어 끌고가서는 밤새 싸움을 하셨어요. 두 분의 문제로 귀한 자식 놈은 한 잠도 못 잤어요. 아, 졸려. 불쌍한 저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를 찾아 나섰어요. 아버지를 잘못 둔 덕분에 자식이 생 방랑을 한 거지요. 사진도 몽타주도 없이 사람을 찾는 일은 세상에서 무진장 힘든 일이여요. 처음에는, “이렇게 저렇게 생기고 나이는 어느 정도인 사람을 아느냐?” 라고 물었어요. 그러면 대개 모른다는 거여요. 그래서 나중에는, “시 장사를 아세요?” 라고 물었어요. 아는 사람들이 좀 있더라고요. 아버지를 장사꾼으로 몰아붙인 것이 한편으론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겨울이면 훈장을 지내면서 등 따뜻하게 주무셨고, 시를 밑천으로 술까지 얻어 잡수시며 유유자적하게 떠돌아다녔어요. 드디어 저는 계룡산 아래에서 아버지를 극적으로 체포했어요. 무조건 바지를 붙잡으며 제발, 오 제발 집으로 가자고 졸랐지요. 엉엉 울며 더 이상 자식을 고생시키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제가 잠을 든 틈을 타 줄행랑을 놓았어요. 으, 미운 아빠! 그런데 늙으신 아버지를 보니 원망보다는 눈물이 비오듯하더군요. 머리에는 흰 눈을 두집어 쓰고 몸은 깡마른 노인이었어요. 저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고, 이제는 잠도 자지 않고 심부름도 가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그 때서야 체념한 듯 순순히 저를 따라 영월로 향했어요. 그런데 아뿔싸, 방심은 금물이라 더니 큰 일을 본다기에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똥누려 갔다가 도망을 쳤어요. 황당! 지게에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2천리 길을 걸어갔다면 상상이 가겠어요. 세상이 허망하고 원통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겠어요. 허송세월을 보낸 저는 평창에서 훈장 노릇이나 하며 슬하에 택진(澤鎭)과 영진(榮鎭)을 두었고, 택진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눈을 감았어요. 그러자 택진이는 나무를 해 팔아 동생을 서당에 보내더니, 영진이는 강원도 건봉사(乾鳳寺)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어요. 영진이는 비록 스님이나 용모도 준수하고 똑똑해 고종 황제는 김삿갓의 후손임을 아시고 벼슬을 내려주었어요. 그래서 홍천 군수를 거쳐 경흥 부윤까지 올랐지요.
아, 돌이켜 생각하면 인생살이란 모두 헛되고 뜬 구름 같아요. 끝으로 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인 삿갓에 대하여 친히 읊은 시를 소개할까 해요. 삿갓은 오랜 세월을 두고 방랑의 동반자였지요. 햇볕도 가려 주고, 비가 오면 비옷도 되고, 부끄러운 하늘까지 가려 주었으니까요.
떠도는 내 삿갓 빈 배와 같아/ 어느 덧 사십 평생을 함께였네 |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역사, 인물 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2> -- 가짜들 쫓겨나다. (0) | 2008.08.09 |
---|---|
열녀(동래부사 송상현의 연인, 김섬) (0) | 2008.08.02 |
[스크랩] 순교자 이차돈의 성은 이씨가 아닙니다 (0) | 2008.07.24 |
endless love(詩妓 김부용-3) (0) | 2008.07.16 |
사랑의 슬픔(詩妓 김부용-2) (0) | 2008.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