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열녀(동래부사 송상현의 연인, 김섬)

道雨 2008. 8. 2. 15:24

 

 

 

열녀(김섬)

임진왜란의 명장 송상현의 연인, 김섬


저는 임진왜란 때 동래성 싸움에서 전사한 송상현(宋象賢, 1551~1592) 동래부사의 애인 김섬(金蟾)입니다.

함흥에서 태어났으며 당대의 명기(名妓)로 소문나자, 송 부사가 찾아와 마음을 차지해 버렸어요.

그 분은 비록 문관이었지만 기상이 장부처럼 늠름하고, 또 충청도 아저씨라 구수한 성격에 인정까지 넉넉했어요. 오랑캐의 침입이 잦은 거친 함경도에서 그 분만은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마음씨 착한 분이었어요.

영화 《접속》을 보셨어요? PC통신을 통해 만난 남여가 손 한번 잡지않고 나눈 밋밋한 사랑이 대종상을 타고, 또 1백만명이 넘는 관객이 보았다고 난리여요.

그래요.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사랑하기보다는, 세상을 살다보면 어느 새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일 뿐이여요. 그 사랑에 대해 도덕과 이성을 들이대어 비난한다면 아마도 사랑을 진실되게 해 본 사람이 아닐거여요. 사랑은 도덕이나 냉철한 이성보다는 확실히 더 양심적이고 따뜻한 그 무엇이며, 자기 노력과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니까요.

송 부사는 청주에서 태어났고(참고 : 아래의 댓글에 의하면 : 송부사의 출생지는 서울이고 그분의 부친 송복흥님의 출생지는 전남 정읍입니다. 정읍에 천곡사지 석탑이 있는 마을이 고향인 셈인가요. 하여튼 송부사는 충청도 분은 아니고 묘역이 현재 청주에 있을 뿐입니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능통해 장래가 총망되는 인재였어요. 동래 부사로 부임하자(1591년), 왜구의 침략을 미리 내다보시고 성을 튼튼히 방비하며 백성들에게 선정을 펼치셨어요.

“난리를 피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직분인데, 죽음을 어찌 피하랴.”

전쟁의 기운은 있었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행복한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왜구가 동래성으로 처들어 온다는 전갈이 있자, 송 부사는 성밖으로 깊은 구덩이를 판 뒤에 울타리까지 쳐 견고하게 방어했어요. 그러자 왜구는 격문을 보내 시비를 걸었어요.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

“죽기는 쉽고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

싸움이 시작되자, 왜구는 허수아비를 성안으로 들여보내 조선군을 교란을 시키더니 노도와 같이 몰려왔어요.

사태가 일순간에 위급에 빠졌어요.

“부사, 소산(蘇山)으로 몸을 피하시죠.”

그러자 송 부사는 아래 장수에게 소리쳤어요. 

“죽음으로서 성을 지키지 않으면 조정에서 용서치 않을 것이고, 또 간들 어디로 가겠느냐.”

왜적은 조선의 장수들을 차례로 죽이고는 마침내 송 부사에게로 다가왔어요.

그러자 송 부사는 급히 갑옷 위에 조복을 입고는 북쪽을 향애 절을 하기 시작했어요. 임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중이지요.

그 장면을 목격한 저는 송 부사가 순절을 결심한 것을 알고, 즉시 여종 금춘(今春)이를 데리고 담장을 넘었어요.

송 부사는 이미 왜구에게 몇 겹으로 포위를 당해 살아 날 가망이 전혀 없었지요. 저는 힘차게 포위망을 헤집고 달려가 송 부사의 가슴에 안겼어요.

“부사 나리, 어서 몸을 피하세요. 예?”

“오, 섬아. 시절을 질못 만나 이 지경이 되었구나. 내 허리 밑에 사마귀가 있는 것을 너는 알지. 그것을 표식으로 내 시체를 거두어다오.”

“부사 나리, 어서 도망을 치세요. 병서에 36계 전술이 뭐인지 아세요. 적을 당하지 못하면 도망치는 거여요. 어서요.”

“아, 네 인생 또한 가련코 불쌍하다.”

“부사 나리, 제발 어서 도망 치세요.”

저는 송 부사의 바지를 붙잡고 마구 잡아 당겼어요. 하지만 송 부사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아요.

사랑에 빠진 저에게는 조국도 백성도 안중에 없었어요. 눈 앞의 죽음만이 슬플 뿐이었어요. 여자의 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니여요.

송 부사는 왜적을 향해 똑똑히 꾸짓었어요.

“이웃 나라의 도가 어찌 이렇단 말이냐. 우리가 너희를 침범한 적이 없는데 너희들은 어찌 이런 짓을 하느냐.”

송 부사가 적의 칼에 숨을 거두자, 남문 위에는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쳤고 수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어요.

왜구는 저를 살려주며 몸을 요구하였어요. 저는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 헤치고는 달겨드는 왜놈마다 이빨로 사정없이 물어뜯었어요.

“이 놈들, 내 낭군을 죽인 원수들아. 어서 나를 죽여라.”

“너는 죽이기에는 너무 예뻐. 그러니 나의 여자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자.”

“더러운 놈, 너희는 서릿발 보다도 더 매서운 조선 여인의 정절을 모르더냐. �a”

저는 목청을 크게 돋구어 왜놈의 얼굴에 침을 뱉었어요. 그 왜놈은 성깔이 나 머리채를 잡고 흔들더니 결국 3일 뒤에 죽여버렸어요.

저는 목이 달아나는 순간 하늘에 계신 낭군을 생각했어요.

“서방님, 저희는 살아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고, 하늘에서는 비익조(飛翼鳥)가 돼요.”

연리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와 가지가 두 갈래로 뻗은 나무요, 비익조는 암수 한쌍이 한 몸이 되어 하늘을 나는 새이니, 살아서도 같이 살고, 죽어서도 함께 있자는 저의 간절한 소망이지요.

왜장 히라요시(平義智)는 송 부사의 죽음을 무척이나 슬퍼하여, 부사를 죽인 왜병의 목을 치고, 이내 송 부사의 시체를 찾아내어 저와 함께 관에 넣어 장사를 지내 주었어요. 그리고 나무를 세워 우리가 묻힌 무덤을 표시를 해 두었어요.

송 부사의 시신은 고향인 청주로 옮겨져 나중에 본부인과 함께 묻히고, 저는 따로 떼내어 일본에까지 끌려갔으나, 절개를 지킨 송 부사의 다른 첩, 이씨 부인과 합장을 해 지금에 전해오고 있어요.

송 부사는 왜적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씨 부인에게 한양으로 급히 올라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떠난 뒤 하루만에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자, 그녀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내 차라리 남편 있는 곳에 가 죽으리라.”

동래로 돌아온 이씨 부인은 붙잡혀 일본으로 보내졌고, 풍신수길은 그녀에게 수청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거절하였지요.

그녀의 의로움은 마침내 풍신수길의 마음을 움직여 다시 조선으로 보내졌고, 한양으로 돌아온 이씨는 몸에 지녔던 송 부사의 갓끈을 정실 부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신분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청주에 있는 송 부사의 묘에는 앞쪽에 저와 이씨 부인을 합장한 묘가 있고, 그 뒤로 부사와 본부인을 합장한 묘가 있어요. 많이들 찾아 오셔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들을 위로해 주세요.


(사진: 청주시 강촌동에 있는 김섬의 묘. 송상현의 묘 앞쪽에 있음)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