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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4> -- 겉으론 후대, 속으론 경계

道雨 2008. 9. 5. 10:12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4>
  겉으론 후대, 속으론 경계
  2001-12-19 오전 10:22:42

 

이성계가 정도전, 남은(南誾), 조인옥 등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대들과 함께 왕실을 위해 힘을 다했는데도 헐뜯는 말이 자주 일어나 우리가 배겨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동북면으로 돌아가 피해야겠다. 먼저 집안 사람들에게 빨리 짐을 꾸리도록 해서 떠나보내겠다.”
  
  “공의 한몸에 종묘 사직과 백성이 달려 있습니다. 어찌 거취를 가벼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남아서 왕실을 도우며 훌륭한 사람을 등용하고 못난 사람을 물리치시는 게 낫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강을 세우면 헐뜯는 말은 모두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 한구석에 물러가 있으면 헐뜯는 말이 더욱 불붙어 무슨 화를 초래할지 모릅니다.”
  
  “옛날 한(漢)나라 때 장자방(張子房)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니 고조(高祖)가 벌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 다른 뜻이 없는데, 임금이 왜 나를 벌하겠는가?”
  
  서로 의논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가신(家臣) 김지경(金之景)이 이성계의 부인 강씨에게 말했습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공에게 동북면으로 돌아가도록 권하고 있으니, 일이 잘못될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을 없애는 게 낫겠습니다.”
  
  강씨가 그 말을 믿고 이방원에게 정도전과 남은 등을 내버려둘 수가 없다고 말하자, 이방원이 대답했습니다.
  
  “아버님은 헐뜯는 말에 시달려 물러가려 하시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해로써 힘써 설득해 가시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김지경을 꾸짖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과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한 사람들이다. 너는 다시 말하지 말라.”
  
  7월에 공양왕이 이성계의 집에 거둥해 술과 음악을 베풀고 밤중까지 즐겼습니다. 이성계는 대궐에 나가 공양왕에게 답례 잔치를 올렸습니다.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옷 삿갓과 보석 갓끈, 안장 갖춘 말을 주었고, 이성계는 즉석에서 입고 절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밤이 되어 유만수가 문을 잠갔는데, 이방원이 몰래 이성계에게 나가자고 하고는 이성계의 명이라며 열쇠 담당에게 문을 열게 한 뒤 이성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도중에 이성계는 임금으로부터 받은 갓끈을 이방원에게 주었습니다.
  
  이튿날 임금이 화가 나 열쇠 담당을 가두었으나, 이성계가 대궐에 나가 술을 이기지 못해 문을 열게 했다고 사과하자 풀어주었습니다.
  
  9월에 이성계는 문하부 판사가 됐습니다. 12월에는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칭호를 더 받았습니다. 이 사이, 이색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귀양지에서 서울로 돌아와 이성계를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이성계는 몹시 기뻐하며 그를 윗자리에 맞아들이고 꿇어앉아 술을 올렸는데, 이색은 전연 사양치 않았습니다.
  
  공양왕 4년(1392) 1월, 밀직사 사(使) 이염(李恬)이 술에 취해 임금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았는데, 간관은 극형에 처하자고 청했으나 이성계가 용서를 청해 결국 곤장을 쳐 귀양보냈습니다.
  
  이성계가 공이 큰데다 사람들이 많이 따르니 공양왕이 싫어했습니다. 또 유력 가문들에서는 사전(私田)을 혁파한 것을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양왕이 이성계를 꺼리는 것을 알자 갖은 방법으로 모함하고 헐뜯었습니다.
  
  실록은 공양왕이 헐뜯는 말을 믿고 밤낮으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몰래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이성계 진영에서는 글을 올려 변명하려 했습니다. 글을 써 놓고 올리지 않았는데, 이성계의 서형(庶兄)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공양왕의 사위 익천군(益川君) 왕즙(王緝)에게 이를 알렸습니다.
  
  변중량은 평소 왕즙과 동갑계를 맺는 등 가까이 지냈는데, 중간에서 사태를 관망하다가 공양왕의 시기 혐오가 이미 극에 달한 것을 알고는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까봐 훗날에 대비해 흘렸다는 것이지요. 공양왕은 이 사실을 알고 이성계에게 말했습니다.
  
  “듣자니 경의 휘하 사람이 글을 만들어 우현보 등을 논죄하고자 한다는데, 경도 알고 있소?”
  
  이성계는 깜짝 놀라 모른다고 대답하고는 물러나와 휘하 사람을 불러 본 뒤 비로소 그 내용을 알고는 중지시켰습니다.
  
  3월, 이성계는 중국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王奭)을 마중하러 황주(黃州)에 갔다가 그길로 해주로 가서 사냥을 했습니다.
  
  길을 떠나려 할 때 방올(方兀)이라는 무당이 강씨에게 말했습니다.
  
  “공의 이번 나들이는 마치 사람이 1백자나 되는 높은 누각에 올라 발을 헛디뎌 떨어졌는데, 거의 땅에 닿기 전에 많은 사람이 모여 받드는 것과 같습니다.”
  
  강씨가 매우 근심했습니다.
  이성계는 활을 쏘며 사냥했는데, 새를 쫓다가 말이 진창에 빠져 넘어지는 바람에 떨어져 다쳐 교자(轎子)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공양왕은 내시를 연달아 보내 문병했습니다.
  
  
  

   
 
  이재황/실록연구가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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