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초혼(류관순)

道雨 2008. 9. 2. 18:47

 

 

 

초혼(류관순)

류관순 열사의 아버지, 류중권


저는 독립운동의 꽃, 류관순의 아버지되는 류중권이라 합니다. 저는 저승을 가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제 딸의 외로운 혼을 위로하고 또 일제의 악랄함을 알리고자 합니다.

관순이가 태어난 곳은 천안의 지령리로, 현재 ‘류관순 생가’가 있는 바로 그 집입니다. ‘인걸은 지령’이라고 하였듯이 ,태어난 곳이 좋아야 훌륭한 인물이 나오는 법입니다.

딸 년은 매봉산 12봉의 정기를 받아 1902년에 태어났는데, 울음소리 한 번 찌렁찌렁 울리더군요. 응~애, 응~애.

저를 닮아 머리가 비상하고 또 효심까지 지극하였던 딸입니다. 저는 열 아들 부럽지가 않게 당시 최고의 수재만 들어간다는 이화학당에 관순이를 보냈어요. 주위에선 딸을 공부시키면 못된 것만 배우고 비행 청소년이 된다고 말렸지만 저의 생각은 달랐어요.

저는 여권신장을 부르짖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그 보다는 귀엽고 예쁜 딸을 잘 키워보겠다는 아비의 마음뿐이었지요.

그런데 끔찍한 일이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어요. 이 날은 고종황제가 승하하시어 장례를 치루던 날로, 고종황제는 나라를 빼앗기고는 울분에 사셨던 분입니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에 숨죽이며 살던 우리 민족은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불렀어요.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자주국임을 세계에 널리 외쳐댔지요.

관순이도 행사에 참석하여 목청껏 만세를 불렀어요. 하지만 독립의 함성은 서울에서만 울려 퍼졌지 지방에는 몰랐어요. 메스콤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이고, 또 독립운동이 전국으로 번질까 봐 일제가 숨기고 막았어요.

20세기에 들어서 한국은 세 번이나 자주권을 잃었어요.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 당하고, 1910년에는 ‘경술국치’로 나라의 주권을 잃고, 1997년 12월 3일에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경제권’을 빼앗겼어요.

그러나 경제를 책임진 대통령을 비롯한 경제 각료의 처신을 보면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요. 경제위기에 빠져 기업이 도산하고, 외화가 바닦 났어요. 

나라 전체가 파산의 위기에 몰렸으나 그들은 국민들을 속이기에 바빴어요. 진실을 왜곡하고 국민들이 모르기를 바랬어요. 마치 손으로 태양을 가리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것이지요.

이를 안타깝게 여긴 관순이는 고향으로 내려와 태극기를 만들더니 사람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어요. 저는 걱정이 되었지만 남자도 하기 어려운 결심을 듣고서 뒤에서 힘껏 도왔어요.

사흘 밤을 기도를 드린 딸은 무슨 영감을 얻었는지 거사를 알리는 봉화를 힘차게 올렸어요. 그러자 우리들은 모두 아우내 장터로 달려나가 만세를 불렀어요.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모두들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어요.

그 해 4월 1일이어요. 만세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자, 일본 순사들이 달려 와 더러운 총칼로 우리들을 사정없이 쏘아대고 찔러댔어요. 저와 집사람도 그들이 쏜 총알을 맞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완전한 비폭력 행사였으나 일본은 무력으로 인정 사정없이 짓밟았어요. 하늘이 노랗게 적개심으로 불탔지만 꺼져가는 숨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관순이도 옆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만세를 부르더군요. 저는 자랑스런 딸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어요.

아! 아! 원통하고 분해요. 제 딸은 아우내 독립운동의 핵심자로 몰려 많은 피를 흘리며 서대문 형무소로 붙잡혀 갔어요.

온갖 아프고 고통스런 고문이 가해졌으며 성폭행보다 더 가혹했어요. 두 눈을 부릅뜬 채 저승에서 바라보자니 피눈물이 나더군요. 동조자를 대라는 고문에도 제 딸은 순사를 호통치며 말했어요.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그러자 놈들은 딸의 형량을 4년으로 결정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7년으로 늘렸어요. 줄어드는게 형량인데 늘어난 경우는 처음이에요.

그런데 더 분한 일이 일어났어요. 제 딸을 살려두었다가는 조선의 독립의지를 잠재울 수 없다고 생각한 일제는, 관순이를 1920년 10월 사지를 여섯토막으로 찢어서 죽였어요.

흐으흑! 세상에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요. 일본 놈, 나빠요. 저희 부부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어요.

제 딸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묻혔어요. 그러나 아무도 영혼과 묘를 돌보아주지 않아 무덤에는 잡초와 나무가 자랐고, 1930년 경 그곳으로 도로가 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아, 그래도 내민족 내 조국입니다. 제 딸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목소리가 하늘까지 울리퍼지더니, 1973년 천안 아우내 옆 매봉산에 추모각이 세워지고, 그 옆에는 가짜 묘지만 ‘초혼 묘’까지 만들어 주었어요.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

병천의 ‘류관순 추모각’에는 그 후 독립운동을 기리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며 딸의 외로운 혼을 위로해 주고 있어요. 어떤 분은 참으로 주옥같은 시까지 지어 바위에 새겨 놓았어요.

 

그대 적어짐으로해서 우리는 이곳에 우뚝 섰다/
아, 미치도록 그리운 조국의 독립으로 이 땅의 해맑은 웃음 이루어 씨되어 흩날리나니/
마침내 그대는 통일의 배꽃으로 태어나소서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