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4대강 사업과 우울증

道雨 2010. 2. 20. 15:44

 

 

 

            4대강 사업과 우울증

 

 

현재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추동력은 ‘돈을 향한 욕망’이라고 한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특별히 탐욕스러운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닐 텐데, 사회 전체가 몰아대는 욕망 담론 속에서 사람들은 사교육과 부동산을 향해, 때로는 주식까지 거머쥐기 위해 허둥대며 달려간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대개의 사람들은 욕망을 좇기보다 그저 이 대열에 동참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거나 혹은 적어도 자녀들을 낙오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영혼의 안식을 잃고 있다.

 

그러한 한국 사회가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이라면서 추진하고 있는 것이 지식기반경제도, 견실한 제조업도 아니고 ‘4대강 사업’이라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반대하는 국민이 절반을 훨씬 넘는데도 사업 강행파는 쇠귀에 경 읽기 수준으로 묵살하고 있다.

 

 

인류 최고의 미녀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아보고, 나뭇잎으로 돈을 만들어 궁정을 휘저어보기도 했던, 괴테의 작품 속 파우스트는 욕망의 맹렬한 질주 끝에 새로운 일을 찾아낸다.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이 간척지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겠다고 선언한다.

자연을 정복하고 개조해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요즘 식으로는 개발사업이라 불릴) 이 사업은 파우스트에게는 숭고하고 원대한 이상이었을지 모르나, 기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는 간척사업을 한답시고 바닷가 오두막에서 평화롭게 수십년을 살아온 노부부 바우키스와 필레몬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파우스트는 결국 우울이라는 병에 걸리고 눈이 먼다. 자신의 선의에 대한 오만한 과신에 빠져 자연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던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은 우울이라는 병과 상관없을까?

 

얼마 전 미국 수도 워싱턴시 부근을 흐르는 포토맥 강과 포토맥 폭포를 짧게나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폭포 부근에서 강은 넓지 않은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줄기로 흐른다.

한 줄기에는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운하가 건설되어 운송로로 이용되었다. 여기에는 갑문이 설치되어 있고 요즘도 유람선이 다닌다.

건너편 강줄기는 급류 때문에 그럴 여건이 아니었다.

 

4대강 사업에서도 강에 굳이 갑문을 설치한다고 하기에 수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녹조가 잔뜩 끼고 녹색 물감을 푼 듯 탁하기 짝이 없는 갑문 쪽 강줄기와 급류 속에서 사람들이 카약을 즐기고 있는 맞은편 강줄기의 수질 차이는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4대강 사업’ 강행파는 이런 것을 보고도 보려 하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으니, 우울보다 더한 병이 아닌가.

강 주변의 자연둔치에서 무수한 생명들이 쫓겨나고 수질이 오염된들, 눈앞의 돈다발에 비하랴 싶은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욕망담론이 지배한다 해도 한국처럼 사회 구성원들의 교육수준이 높은 사회에서는 이런 식의 몽매주의가 통할 수 없다.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4대강 사업’이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일자리로 말하자면, 자연을 보호하고 지키는 데서 좀더 차원 높은 일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강을 그대로 흐르게 두되 문제가 있는 구역에서만 수질 정비 사업을 하는 것이 정도이다.

 

대안으로는, 막혀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풀어야 한다.

사회적 복지 서비스를 확대하면 괜찮은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요, 특히 남북 사이의 인적·물적 교류를 활성화하고 북한의 경제건설을 돕는다면 여기서 일자리들이 생길 것이 아닌가.

청년실업 문제의 해결책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설 명절에 만난 친척들과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4대강 사업’ 좋다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