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누가 국가안보를 말하는가?

道雨 2010. 5. 25. 13:47

 

 

 

            누가 국가안보를 말하는가?

 

 

정부는 북한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발표대로라면 북한의 무모한 도발에 공분을 느끼며 그에 마땅한 대응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동시에 국가안보가 이토록 구멍이 나도록 방치한 책임자들을 엄중 처벌하고 무너진 안보체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여기에 무엇이 진정한 국가안보인지 성찰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여권 인사들이 국가안보를 구멍 낸 장본인들이면서도, 그 잘못을 과거 정부의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정부의 안보정책을 비교해보는 데서 답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대한민국은 국가안보를 증진하기 위해 북한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분쟁을 막는 ‘평화 유지’와 남북 대결 상태를 완화하고 해소하기 위한 ‘평화 증진’의 두 가지 정책을 병행하여 추진한다. 이를 기준으로 비교해보자. 

 

참여정부는 충분한 대북 억제 전력을 갖추기 위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방비를 연간 9% 안팎으로 증대했다. 잠실 롯데 터에 100층이 넘는 초고층빌딩을 지으면 2만8000여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는 점 때문에 고심했지만, 그렇게 되면 성남공군비행장 기능이 불구가 되어 수도권 안보에 중대한 결함이 발생하게 된다는 군의 판단을 존중하여 이를 접었다.

천안함 비극의 현장이기도 한 서해 북방한계선(NLL)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2004년 북한을 설득하여 서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체계를 수립하기도 했다.

 

그 결과 참여정부 5년간 북방한계선에서는 물론, 휴전선에서도 교전이 한차례도 일어나지 않았고, 남북 대결로 인해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 때부터 추진한 금강산 관광 사업은, 북한 최남단 해군기지인 장전·성직항의 군함들을 금강산 북쪽 해역으로 이동시켰으며, 육로관광은 북한 군부대들을 후방으로 재배치하도록 만들었다.

개성공단이 건설되면서 북한의 전차, 자주포부대 등 많은 병력이 개성공단 이북으로 재배치되었다. 남북 대결의 최대 요충지이자 북한군이 서울에 최단시간에 접근할 수 있는 서부전선의 휴전선은 그 이북에 개성공단이 세워진 덕분에 그만큼 북상한 셈이 되었다.  

 

유사시 개성공단은 북한의 기습남침 시간을 지체시키고, 북한군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하기 쉽게 하여 국군이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해준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개전 초기에 전력상실이 가장 큰 현대전의 특징으로 볼 때 개성공단의 안보적 가치는 국군 몇 개 사단과도 바꾸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고 말한다.

 

이러한 평화증진 정책의 결과, 휴전선에서 불과 10여㎞ 남방에 거대한 엘시디(LCD) 공장과 수많은 협력업체들이 들어섰으며, 그동안 군사보호지역으로 묶여 정당한 재산권 행사도 못했던 한수 이북 토지들도 개발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안보정책은 어떠한가?

그들은 국방비 증가율을 3%대로 깎고, 롯데의 잠실 빌딩 신축을 허가하고, 멀쩡한 군사격장에 4대강 준설토를 쌓고, 4대강 사업에 군대를 동원하려 한다.

남북관계에서는 군인들이 전사하고, 민간인이 피살되고, 우리 국민이 북에 장기간 억류되는 불안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금강산 관광의 문은 닫혔고, 개성공단도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

북한과 대결하고 압박을 가하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북한의 태도변화도 붕괴도 아닌, 북한의 중국 의존도 심화뿐이다.

안보는 4대강에 밀렸고 평화는 증진은커녕 유지조차 못하고 있다. 

 

여권이 자신의 무능으로 취약해진 안보를 가리기 위해, “때려잡자 공산당”식의 말로만 하는 농성식 안보에 매달리는 동안, 국민의 삶은 더 불안해지고,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안보리스크는 높아지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싼 땅값에 이끌려 휴전선 근처를 개발하고, 값싼 북한 노동력을 활용하려고 개성공단을 개발했던 기업인들의 시름도 깊어만 가고 있다.

이 정권이 국가안보를 말할 자격이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이종석 : 참여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통일부 장관을 역임. 현재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한반도평화포럼 상임위원>
 
 
 
 
 
 
 
 

"어릴 적 가난이 싫어 소 판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나는 묵묵히 일 잘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제 그 한마리가 천 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갑니다."

 

1998년 6월 16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고향인 강원도 통천으로 갔다. 이 '소떼몰이 방북'을 프랑스의 문화비평가 기 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 예술"이라고 표현했다.

 

"이번 방문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방문이 아니라 부디 남북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환경의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라는 정 명예회장의 말처럼 그 개인에게는 금의환향의 길이었고, 역사적으로는 한반도의 냉전을 깨트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세계 최초의 민간 황소 외교"

 

영국의 <인디펜던트>가 "미국과 중국 간 핑퐁외교가 세계 최초의 스포츠 외교였다면 정 회장의 소떼몰이 방북은 세계 최초의 민간 황소 외교"라고 평가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 '전위예술'은 4개월 뒤 2차 501마리 소떼 방북을 거쳐 11월 18일 금강산관광으로 연결됐다.

 

당시 금강산 관광은 IMF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투자안정성을 높이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미국이 북한의 금창리 지하핵시설의혹을 제기하고, 북한이 8월에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급격히 뜨거워진 한반도를 소떼와 관광객이 식힌 것이다.

 

관광이 시작된 이틀 뒤인 11월20일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서울에 온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숙소에서 TV로 관광선 봉래호가 떠나는 장면을 봤고, 다음날 정상회담에서 "아름다웠다,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외국인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분위기'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북한은 금강산 주변 병력을 후방으로 뺐다. 북한은 최남단 해군기지인 장전항과 성직항 함정들을 북쪽 해역으로 옮겼고 동해선과 금강산 연결구간에 있던 북한군 5개 부대도 뒤로 옮겼다(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2009년 10월 7일 '사단법인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 특강'). 특히 북한의 군사적 요충지인 장전항의 개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직접결심을 통해 성사됐다.

 

이런 과정이 쌓이면서 1999년과 2002년 서해교전 때는 '서해에서는 총질하고 동해에서는 관광객이 오가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보수세력은 난리를 쳤지만, 서해의 열전을 동해에서 냉각시킨 것이다.

 

서해에서는 총질하고 동해에서는 관광선이 뜨고

 

  
금강산 면회소 전경.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금강산면회소

 

2006년 11월  통일부는 국정브리핑에 올린 '우리에게 금강산관광은 무엇인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금강산 관광을 위해 군사분계선이 열리고 비무장지대의 지뢰가 제거되었으며, 잠수함 기지가 있던 장전항에 해상호텔이, 북한군 포진지가 있던 자리에는 골프장이 들어섰다.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에도 직접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그러기에 금강산 관광은 단순 경제거래 이상의 평화사업이다."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은 금강산 관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대는 여기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상회담 성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현대 정몽헌 회장이며 정주영 명예회장은 후광역할을 했다"(박지원 전 장관, 2009년 <내일신문>과 인터뷰)는 것이다.

 

개성공단도 금강산관광을 통해 형성된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성사되기 어려웠다. 현재 개성공단에는 120여개의 남측기업이 들어가 있고, 협력업체와 연관업체도 2600개가 넘는다. 그리고 4만명이 넘는 북측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흡수통일론의 시각으로 봐도 북한내부에 깊게 '자본주의 파이프'가 박혀있는 셈이다. 

 

2007년 7월 11일 고 박왕자씨 피격사건으로 중단될 때까지 193만 4662명의 남측관광객이 금강산을 찾았다.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금강산을 통해 남측사람들이 북한을 접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와 함께 금강산은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한 각종 사회문화교류의 무대였다. 남북정상회담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했다.

 

'전위예술'은 종종 그 앞서나감으로 인해 시대와 불화하기도 했다.

 

금강산 관광은 애초 고 정 명예회장이 1989년 1월에 북한과 합의한 것으로, 여건이 좋았다면 그해 7월에 시작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내부논란과 '공안정국' 속에서 무산됐고, 정주영 회장의 대선출마와 패배로 김영삼 정부 5년을 보낸 뒤인 1998년에야 사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애초 생각보다 9년이나 늦게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동안 진행된 금강산 관광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민간부동산 몰수 하나만 남은 '금강산 관광'

 

결국 북한은 지난 23일 이산가족면회소 등 금강산 내 남측 정부자산을 몰수한 데 이어, 온정각 등 민간부동산에 대한 동결조치를 진행했다.

 

30일에는 "16명만 남고 나머지 금강산 관광 관련 인력은 5월 3일 오전 10시까지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예고했던 남측인력 추방조치를 시작한 것이다. 폐쇄까지는 민간부동산 몰수 하나만 남았다.

 

첫 관광을 시작한 지 12년만에, 고 정 명예회장 밑에서 잔뼈가 굵고 성공의 발판을 만든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문을 닫게 된 것이다.

 

남북간 상거래를 '퍼주기'로 보고, 관광대가로 현금이 건너가서는 안 된다는 이 대통령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자신의 '대부'가 일궈낸 금강산관광을 "북한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다, 실패하고 만 것"(김영윤 남북물류 포럼대표)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더 큰 문제는 이제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는 수단은 개성공단 하나만 남게 됐다는 점이다. 그나마 태풍 영향권에 들어간 상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