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청빈한 선비들이 있었다.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이산해는 그 표본이었다. 그는 평생 벼슬에 종사했지만, 집 한칸 밭 한뙈기도 없었다. 손님이 오면 말 잔등에 깔던 언치에 나앉을 정도로 살림이 옹색했지만 늘 태연자약했다. 인물평에 유난히 까다롭던 율곡 이이도 이산해에 대해서는 두 손을 들었다. 그는 선조에게 이산해를 극찬한 적이 있다. “이산해가 이조판서를 맡자 모든 청탁이 사라졌습니다. 이대로 몇 년만 더 지난다면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연려실기술>) 셋집만 전전하다 칠순에 접어든 이산해는 결국 서울 장통방의 셋집에서 눈을 감았다.
백사 이항복도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지만 셋집살이를 했다. 남인의 영수 우의정 허목도 구리개의 셋집에 살았다. 좌부승지 백유함도 개성의 셋집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권력과 부와 명예가 대대로 세습되던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청빈한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가난을 자랑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요새는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장관감 하나 제대로 없다. 서민들은 전셋값 폭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지도층 인사란 사람들은 평소 저지른 부동산투기 따위의 범법행위 때문에 눈앞에 떡을 두고도 못 먹는다.
<백승종 역사학자 >
정승판서도 셋집 살아야?
»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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