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로의 결혼>은 1781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은 프랑스 왕 루이 16세는 귀족에 대한 풍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공연을 금지시켰다.
검열에 통과하기 위해 3년 동안 수정 작업을 거친 뒤 1784년 이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수정을 했음에도 이 연극에서는 귀족에 대한 도전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당신들 대영주는 신분, 재산, 지위를 자랑스러워하지요! 그러나 태어나는 고통을 빼면 그 축복을 받기 위해 당신들이 한 게 무엇인가요?”
명확한 이 조롱에도 연극에 박수하고 2년 뒤 모차르트가 오페라로 올린 공연에 갈채를 보내던 사람들은 귀족이었다.
신부의 몸을 신랑보다 영주가 먼저 경험해야 한다는 봉건적 초야권을 행사하려던 주인의 의도를 용기와 기지로 무산시키고 피가로는 결혼에 성공한다.
‘피가로의 결혼’은 하인과 주인이 평등해질 시대의 예고였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하여 이 연극에 열광하던 귀족들과 달리 루이 16세는 여기에 내포된 위험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만일 이 연극이 공연된다면 바스티유가 무너질 것이다.”
왕은 베르사유 궁에서 연극을 낭송하려는 계획도 취소시켰다.
그러나 보마르셰는 호언장담하며 돌아다녔다.
“국왕이 <피가로의 결혼> 공연을 원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공연되어야만 한다.”
바야흐로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
피가로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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