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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고’ 한반도의 블랙코미디

道雨 2011. 1. 22. 16:03

 

 

 

      ‘화약고’ 한반도의 블랙코미디
 

 

미국 전략공군기지 사령관 잭 리퍼 장군.

평소 미국이 공산주의자들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극우 반공주의자다.

충치 예방을 위해 수돗물에 불소를 첨가하는 걸 미국인들을 망가뜨리려는 공산세력의 음모로 간주한 그는 히스테리 발작 끝에 ‘빨갱이 타도’를 위해 자신이 관장하는 핵폭탄 탑재 B-52 전략폭격기들 출격을 명한다.

 

백악관은 허둥지둥 핫라인을 가동해 소련 수뇌부에 사정을 설명하고 대응공격 자제를 요청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소련이 자국이 핵공격을 당할 경우 방사능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절멸시켜버리도록 고안된 ‘최후의 날 장치’가 저절로 작동하게 해 놓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 개의 핵폭탄이라도 소련 영토에 떨어지면 지구는 끝장이다.

 

출동한 전략폭격기들을 일반통신회로로 불러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회항명령은 방해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마련된 특수암호장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암호를 알고 있는 건 리퍼뿐.

공수부대로 사령부를 공격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암호를 해독하고 회항명령이 떨어졌다. 대다수 B-52는 기수를 돌렸지만 그게 통하지 않은 일부는 미사일로 격추시킨다.

 

그런데 단 한 대의 B-52가 미사일 공격에도 살아남아 애초의 명령대로 돌격한다. 고장난 핵폭탄 투하장치를 고치다 결국 그 폭탄 위에 올라탄 채 말 탄 카우보이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떨어져내리는 열혈 마초 반공주의자 콩 소령.

 

 

100년 영화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들 중 하나로 꼽힌 스탠리 큐브릭의 유명한 블랙코미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그리하여 지구 곳곳에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원자구름들 모습을 보여주며 정말 웃기게도, 어처구니없이, 하지만 애잔하고 비통하게 끝난다.

 

쌍방 절멸로 가는 핵무기 선제공격과 보복이라는 냉전기의 상호확증파괴(MAD)를 기막히게 풍자한 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증오와 피해망상 바이러스에 감염된 등장인물과 위험천만한 장치들은 냉전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을까.

아니다. 적어도 한반도에선.

 

 

‘또라이’ 사령관이 꼭 극우 반공주의자여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북의 극좌 맹동주의자나 극우 민족주의자들 중에도 얼마든지 있다.

수많은 첩자들이 침투해 있다고 망상하는 음모론이나 증오 바이러스에 감염당한 남북의 스트레인지러브나 리퍼 또는 콩 소령들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는 순간 ‘최후의 날 장치’가 가동될 수 있는 곳이 한반도다.

메가톤급 핵폭탄이 아니라 쌍방이 첩첩이 쌓아놓은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좁은 한반도는 삽시에 절멸 수준의 석기시대로 돌아간다.

 

게다가 전략폭격기를 출동시킬지 말지를 결정하는 남쪽의 최종 책임자는 한국인이 아니다.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을 지니고 있는 미국인이다.

미국인 극우 마초가 ‘미국 만세’를 부르며 망상에 빠져드는 순간 언제든 실제 전쟁으로 돌입할 수 있도록, 동족에 대한 증오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반도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 전쟁은 6·25전쟁이 그랬고 임진왜란이 그랬듯이 결국 한반도를 전장으로 삼은 미국(일본)-중국 전쟁이 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 집권 3년 만에 그게 다시 우리의 현실이 됐음을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처럼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