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죽산 조봉암의 선견지명

道雨 2011. 1. 24. 14:36

 

 

           죽산 조봉암의 선견지명
 

 

 

지난주 대법원은 죽산 조봉암(1898~1959)의 재심사건 선고 공판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진보당 당수 죽산이 북한 간첩 혐의로 1959년 7월31일 처형된 지 52년 만의 일이다.

 

이 소식을 들으며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신은 진실을 안다. 그러나 기다린다>에 나오는 사형수를 연상하게 된다.

 

 

죽산 사상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배격하고 평화통일론을 폈고, 둘째, 공산독재와 자본, 특권계급의 독재를 배격하고 제3의 길(사회민주주의)을 추구했다.

돌풍을 일으켰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죽산이 내건 공약은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의 단결’이었는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의 과제는 이 두 가지다.

남북관계가 이처럼 험악하고 뒤늦게 복지국가 논쟁이 활발한 오늘 시점에서 보면 죽산의 선견지명은 놀라울 정도다.

당시 진보당의 강령·정책에는 ‘국민의료제도와 국민연금제도, 초등교육부터 최고학부까지 점진적 국가보장제’가 들어 있어 현재 쟁점인 보편적 복지의 싹을 볼 수 있다.

 

죽산의 생애는 오로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일생이었다.

강화의 빈농에서 태어나 20살에 3·1운동에 가담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일본에 건너가 엿장사로 고학을 하면서 책에 취해서 책만 읽었는데 자연히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사상에 기울었다.

그 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이었고, 1932년 일경에 체포되어 7년간 살을 에는 신의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가 7개나 절단됐다.

 

초대 농림부 장관 시절, 보수 정적들이 터무니없는 공금유용 혐의를 씌워 죽산이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의 재판장 한격만은, 나중에 진보당 사건 때 죽산의 변호사로 나섰다.

그는 몇 년 전의 죽산 재판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재판석에서 나는, 피고인석에 앉은 죽산의 손가락 마디들이 떨어져 없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체포,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들이 썩어 떨어진 고생을 겪은 분을, 일제시에 그래도 편히 지낸 내가 감히 재판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라고 술회하자 법정이 숙연해지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죽산의 판단력은 남달랐다. 좌익이었지만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소련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을 비판하며 1946년 초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공개편지를 써서 당에서 제명처분 당한 일, 1948년 초대 총선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민족주의 세력이 선거를 보이콧했을 때 의외로 출마해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일, 친일파와 지주세력으로 가득 찬 초대 이승만 정권에서 독야청청 독립운동가 출신으로서 농림부 장관을 맡아 농지개혁을 추진한 일, 세상이 극좌, 극우로 갈라져 싸울 때 독자적 중간노선을 추구한 일 등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죽산의 명예회복일 뿐 아니라 이 나라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인 결정으로 높이 평가하고 환영해 마지않는다.

평화통일과 복지국가라는 죽산의 시대정신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그게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이정우 : 경북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