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백성과 약속 지키려 ‘파멸의 길’ 걸은 오이디푸스

道雨 2011. 11. 26. 10:30

 

 

 

백성과 약속 지키려 ‘파멸의 길’ 걸은 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의 1842년 작품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테바이의 재앙과 근친상간과 친족살해의 죄악으로 인해 자신의 눈을 후벼낸 오이디푸스는 테바이를 떠난다. 그의 곁을 딸이자 누이동생인 안티고네가 지킨다. 오이디푸스는 자기 행동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떠난 영웅인가, 아니면 운명에 짓밟힌 가엾은 인간의 전형인가?
백성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파멸을 주저하지 않았던 오이디푸스. 국가의 안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그에 대해 당당히 책임을 지고, 자기 처벌과 추방을 요구했던 지도자. 그의 영웅의 면모는 참혹한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빛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불행한 신탁을 타고난 남자, 오이디푸스.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타향에서 자라나다, 신탁을 듣고 운명을 피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운명이란 신이 인간에게 찍어놓은 낙인 같은 것. 인간인 한, 그것을 피할 수도 씻어낼 수도 없는 법.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끔찍한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삶의 모든 것을 걸었다.

인간의 한계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 한계에 굴하지 않고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신의 경지를 갈망하며 불멸을 꿈꾸던 옛 그리스의 전형적인 영웅을 꼭 닮았다.

 

특히 그가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테바이를 구했을 때, 그는 순식간에 영웅으로 떠올랐다. 매혹적인 여자의 얼굴에 사자의 몸통, 새의 날개로 날아다니며 테바이 시민들을 낚아채어 잡아먹던 스핑크스를 물리친 것이다.

테바이는 오이디푸스에게 열광했다. 당시 테바이의 실권을 쥐고 있던 크레온은 자신의 누이이며, 선왕이었던 라이오스의 아내인 이오카스테를 오이디푸스에게 아내로 주고 왕권도 함께 건네었다.(아폴로도로스 <신화집>)

 

 

여기까지. 오이디푸스는 신탁에 순응하지 않았고 과감하게 운명과 싸웠으며, 마침내 테바이의 왕이 되었다. 인생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운명에 맞서 실천한 모든 도전은 경악스럽게도 그를 신탁의 운명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게 만들었다.

신탁을 피하기 위해 자기를 길러준 땅 코린토스를 벗어났던 탓에 오히려 그는 자기를 낳아준 땅 테바이로 돌아갔다. 그 여정에서 그는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하지만 아직은 세상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오이디푸스의 영광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신들은 친족살해와 근친상간의 죄를 가만두지 않았다. 호메로스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전해준다.

신들은 오이디푸스의 끔찍한 행동을 곧바로 인간들에게 알려주었고, 이오카스테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오이디푸스는 온갖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신들의 파괴적인 계획으로 인해 계속 테바이를 다스려야 했단다.(<오디세이아>)

모든 참상과 치명적인 과오에도 불구하고 테바이 사람들은 오이디푸스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고, 그는 왕으로서 임무를 계속해나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구성했다.

오이디푸스가 아무것도 모르고 테바이의 왕 노릇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역병이 테바이를 휩쓸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오이디푸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예전에 스핑크스를 물리쳐서 국가를 위기에서 구했던 것처럼, 다시 구원의 능력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만만했다. 도탄에 빠진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선왕이었던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찾아내 징계하고 추방해야 했다. 그 살해범이 테바이 안에 들어와 도시를 더럽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이디푸스는 그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 응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범인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은 다름 아닌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임이 밝혀졌다. 게다가 죽은 라이오스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이며, 지금 함께 침실을 쓰는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임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끔찍한 신탁이 모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오이디푸스는 과연 영웅일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는 범인이 누구이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운명의 올가미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당당하게 맞섰다. 모든 사실이 밝혀져 갈 때,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더 이상 캐묻지 말라고 하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고 진실과 파멸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모든 사실이 명백해지자, 그는 자신의 눈을 후벼냈다. 그리고 외쳤다.

 

“그것은 바로 아폴론, 아폴론이오, 친구들이여,/ 내가 겪은 이 몹쓸, 내 몹쓸 일들을 이루신 이는./ 하지만 지금 내 눈을 찌른 건, 바로 내 손이오, 다른 누구도/ 아닌 가련한 내가 한 것이오.”

 

인간의 운명은 인간을 넘어선 신이 정한 것, 인간은 운명의 틀 안에 묶여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인간에겐 그의 운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운명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유로운 선택도 자발적인 행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연 오이디푸스는 그가 저지른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가?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만큼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었나?

그런데 운명의 족쇄에 묶여 있음을 깨달은 그 순간, 그는 무력하게 무너지는 대신, 자유를 힘차게 외친다. 운명에 굴하지 않고, 신의 초월적인 힘에 대고 자유를 외치는 단단한 모습. 그것이 바로 오이디푸스가 보여준 영웅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영웅성은 또 다른 측면에서 눈부시다. 그는 테바이의 왕이다. 도시를 더럽힌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반드시 찾아내 벌을 내리고, 나라 밖으로 내쫓아 도시를 깨끗하게 하겠노라고 선언했고, 국민들과 약속했다.

그 약속을 이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라이오스의 살해자이며, 도시를 더럽히고 국가를 재앙에 빠뜨린 원흉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는 이제 국민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철저히 파괴되어야 한다. 국가의 재앙을 몰아내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징계하고 추방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눈을 후벼 파내며 철저히 파멸했다.

 

 “이와 같이 더러운 먼지를 내가 뒤집어쓰고도/ 어찌 내 눈으로 이 백성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겠소?”

 

그는 영원한 어둠에 자신을 가둔 후, 나라 밖으로 추방되어 영원히 떠돌게 하라고 요구했다. 백성들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자기 파멸을 주저하지 않았던 오이디푸스. 국가의 안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그에 대해 당당히 책임을 지고, 자기 처벌과 추방을 요구했던 지도자. 그의 영웅의 면모는 참혹한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빛난다.

 

»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만약 그가 권력에 연연했다면, 적절한 시점에서 수사를 멈추고 모든 사실을 은폐했을 것이다. 연명을 위해 동정을 구걸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도시는 더럽혀진 상태로 또 다른 재앙에 휩싸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랬나 보다. 소포클레스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라는 작품에서 다소 비겁한 모습의 오이디푸스를 그려준다.

 

여기에서 그는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계속 테바이에 머문다.

그의 두 아들은 권력 계승의 문제를 놓고 다투며, 그 와중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식들의 손에 강제로 내쫓긴다. 두 아들은 마침내 외부 세력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벌이며 테바이를 도탄에 빠뜨린다.

 

오이디푸스는 그런 아들에 대한 분노로 저주를 퍼붓는 고약한 노인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 여인들>이라는 작품에서도 오이디푸스는 무력한 노인으로 등장한다. 여기에서 오이디푸스는 그의 두 아들이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둘 다 죽을 때까지도 테바이에 구차하게 연명하다가, 이오카스테가 자살한 후, 처남인 크레온에게 강제로 쫓겨난다. 그는 영웅이 아니라, 비극적인 운명에 철저하게 짓밟힌 누추하고 딱한 늙은이일 뿐이다.

 

어떤 모습이 진정한 오이디푸스의 모습일까?

 

‘실수는 인간다운 일’(errare est humanum).

 

잘못을 저지르며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우리의 곡절 많은 삶에 대해 오이디푸스의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