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은 과연 명실상부한 조선시대 최고 명의였을까.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였을까.
방송과 드라마를 통해 본 허준의 모습과 실재는 당연히 차이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그의 평생 후원자였던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본 그의 모습은 어떻게 차이가 날까?
세속적인 우리로서는 최고 명의로서의 전설적인 면모보다, 평범한 인간적인 모습의 허준 이야깃거리를 더 탐구하고 싶다.
야사(野史)로 전해오는 이야기지만 ‘난리탕’이라는 처방은 청탁을 배격하는 허준을 평가하는 또 다른 일화다.
허준이 당대의 명의로서 뜨는 어의가 되자 당연히 사대부들로서는 몸이 아프면 왕진을 청했다. 비록 어의지만 사대부와 의관의 신분 격차는 엄청난 것이다.
진료 청탁을 거부하기 힘들었던 그로서는 자신이 각기병에 걸려서 왕진하기 힘들다는 뜻을 전했다. 각기병은 요즘말로 다리가 불편해서 거동이 불편하다는 면피용 질병명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두가 몽진을 떠나기 위해 허둥대며 임금을 모시고 대궐을 나섰다. 이 때 허준이 제일 앞장서서 종종걸음으로 앞서 나간 모양을 보고 오성 이항복이 건넨 한마디가 바로 난리탕이다.
“어의 허준의 각기병에는 난리탕이 최고요.”
진료 청탁을 거절한 허준을 비꼰 말이다.
허준은 드라마와 달리 과거를 거치지 않고 내의원에 들어갔다. 그의 평생 후원자였던 미암 유희춘이 이조판서 홍담에게 1569년 윤6월3일 천거를 해서 들어간 것이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많은 진료 청탁과 이 부탁을 정성껏 수행하는 허준의 모습이 곳곳에 정성스럽게 드러난다.
1569년 당시 유희춘은 나주에 사는 나사침과 그의 아들 나덕명의 병을 진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또 남원에 거주하는 신흔의 병을 부탁하는데 허준은 병이 비록 중하지만 치료될 수 있다고 보고한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자신의 병은 물론 부인의 고질병 치료를 부탁하였으며 종기 치료를 위해 얼굴에 지렁이 즙을 바르고 토사자환을 처방한다.
또 서울 근교에 살고 있던 송사재 송순의 병을 가보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불호가 분명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성을 다하여 진료하는 인간 허준의 또 다른 면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대부분 사대부의 입장에서 한사람을 평가하고 기록한 것이다.
선조가 죽자 사간원은 허준을 강력히 비난한다.
“허준이 본시 음흉하고 범람한 사람으로 자신이 수의가 되어 약을 씀에 있어 많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저질러 망녕되이 극히 찬 약을 써서 마침내 선왕께서 돌아가셨다.”
어의로서의 자질을 의심한다는 비난이 쇄도한 것이다. 특히 인간적인 평가에서 모진 곤욕을 치른다. 음흉하고 범람한 사람으로 규정하며 사대부들의 왕진 청탁을 거절하였던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한다.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듣지 않은 점은 광해군 또한 인정한 바다.
1608년 광해군은 사간원이 허준의 석방 명령 환수를 주장하자 이렇게 답한다.
“약을 처방함에 있어 허준의 치료능력을 잘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대로 옳다고 생각하면 시행하며 정성껏 처신하는 그 뜻을 감안하여 석방한다.”
고집센 그의 소신을 높게 평가하여 오히려 석방했다는 이야기다.
망녕되이 극히 찬 약을 썼다는 데는 선조가 직접 언급한다.
선조 40년 10월9일 해돋을 무렵 왕세자가 문안하려고 동궁에서 나오는데 임금의 환후가 위급하다고 전언한다.
임금이 기침하여 방 밖으로 나가다가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의식이 들지 않자 한꺼번에 청심원, 소합원, 생강즙, 죽력, 계자황, 구미청심원, 조협가루, 묵은 쌀죽 등의 약을 올렸다.
청심환이나 구미청심환, 죽력 등의 찬 약제를 한꺼번에 집중 투여하자, 선조는 이튿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10월10일 “의관들은 풍증이라고 말하나 내 생각에는 필시 명치 사이에 담열이 있는 것 같다. 망령되이 너무 찬 약제를 쓰다가 한 번 쓰러지면 다시 떨치고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미음도 마실 수 없으니 몹시 우려된다. 다시는 이처럼 하지 말라.”
이런 불만스런 상황에서 40년 10월26일 선조는 지속적으로 복용하고 있던 영신환이라는 약물에 대해서 다시 한번 거부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새로 지어들인 영신환을 복용한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나 그 약 속에는 용뇌 1돈이 들어있다. 용뇌는 기운을 분산시키는 것이니 어찌 장복할 수 있는 약이겠는가. 더구나 지금처럼 추운 시기이겠는가. 요즈음 먹어보니 서늘한 느낌이 들어 좋지 않다. 의관들이 필시 오용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40년 12월3일은 허준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진료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린다.
“사당원(砂糖元)을 들이자마자 또 사미다(四味茶)를 청하니 내일은 또 무슨 약과 무슨 차를 계청하려는가. 허준은 실로 의술에 밝은 양의(良醫)인데 약을 쓰는 것이 경솔해 신중하지 못하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의 전체적인 평가에서는 당연히 최고 어의로서 확고한 신뢰를 받았다는 기록이 많다.
“고금의 의료서적에 널리 통달하여 약을 쓰는데 노련하다.” -선조-
“허준은 내가 어렸을 때에 많은 공로를 끼쳤다. 근래 나의 질병이 계속되어 그를 곁에 두고 약을 물어서 쓰고 싶다.” -광해군-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능력과는 달리 왕조실록에서의 인간적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허준이 성은을 믿고 교만을 부리므로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기록할 정도다.
개인적으로 추측하면 역시 치료 청탁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점과 호불호가 분명한 점, 자신의 진료에 타협하지 않는 외골수적 성격이 낳은 어두운 결과였다.
만약 그가 진료 청탁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면 동의보감을 비롯한 수많은 저작들은 나올 수 있었을까.
일본의 저명한 학자가 우리나라에 노벨상이 나올 수 없는 이유를 주변관계를 중시하는 ‘나이트 라이프’ 때문이라고 지적한 점은 허준의 일대기에서도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