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자료, 기사 사진

DJ 내란죄 엮은’ 간첩사건 34년만에 무죄

道雨 2011. 9. 24. 11:45

 

 

 

DJ 내란죄 엮은’ 간첩사건 34년만에 무죄
 

 

재심 재판부 “고문에 따른 자백은 증거 못돼”
‘국가기밀 유출혐의’ 재일동포 2명 누명 벗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빌미가 됐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들에게 34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고법 형사8부(재판장 황한식)는 23일, 전방 견학을 하면서 탐지한 군사기밀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소속 공작원에게 전달하고, 유신헌법을 비방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던 김정사(56)씨와 유성삼(57)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970년대 모국으로 유학 온 재일동포 김씨와 유씨는 간첩 혐의로 1977년 4월 국군보안사령부에 체포된 뒤 구속 기소됐다.

재판 과정에서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해 거짓자백을 했다”고 호소했으나, 대법원은 각각 징역 10년과 6년형을 확정했고, 이들은 1979년 8월 형집행정지 결정이 날 때까지 구금돼 있었다.

또 국외 유신독재 반대 단체인 한민통은 ‘반국가단체’로 규정됐다.

이 판결 탓에, 한민통 결성 당시 의장으로 내정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0년 ‘내란음모 사건’의 수괴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이 “피의자들에 대한 불법구금, 고문, 폭행, 협박을 통해 조작됐다”고 결론을 냈고, 김씨 등은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재심 재판부는 이날 “보안사에 의한 영장 없는 구속과 고문, 이후 계속된 위협으로 이뤄진 김씨 등의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며, “우연히 북한 평양방송을 통해 명동성당에서 있은 반정부 집회,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반정부 투쟁 소식 등을 청취했다고 해서, 이것만으로는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거나 주관적으로 반국가단체에 이롭다는 데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긴급조치 9호는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한 유신헌법이나 현행 헌법에 비춰볼 때 표현의 자유나 청원권을 제한해 위헌이므로, 이들의 긴급조치 위반 혐의도 무죄”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1978년 대법원이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한민통의 성격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

 

 

 

 





 

 

‘한민통’이란?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이 단행되자, 국외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동포들을 끌어모았다.

이때 결성된 모임이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으로, 초대 의장엔 김 전 대통령이 내정됐다.

 

해외에서의 반박정희 움직임에 당황한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민통의 결성식을 1주일 앞둔 1973년 8월8일 김 전 대통령을 납치했고, 한민통 회원들은 앞장서서 그의 구명에 나섰다.

 

한민통이 국외 ‘유신 반대’ 운동의 구심점으로 떠오르자, 박정희 정권은 1977년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씨 간첩 사건을 조작하면서,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몰았다.

 

한민통은 1989년에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77년 법정서 ‘고문당했다’ 말했지만, ‘판사 김황식’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누명 벗은 김정사씨
한민통 반국가단체 아닌데, 재심서도 판단 안해줘 실망
DJ의 억울함 풀지못해 죄송

 

 

“수사관도 들어와 있던 그 법정에서 용기를 내어 ‘고문을 받았다’고 호소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판사 셋이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 표정이 생생합니다. 그때 좌배석 판사가 지금의 김황식 국무총리입니다.”

 

34년 만에 간첩이란 누명을 벗은 김정사씨는, 23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1977년 당시 1심 법정의 풍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고문받았다는 사실보다도 자신들의 호소를 외면한 법관들에 대한 절망이 더 커 보였다.

 

김씨는 “판사들은 ‘어떻게 고문받았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전 그때 쇼크(충격)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았지만, 법원의 행태가 실망스럽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재심 재판부가 이번 사건의 핵심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의 반국가단체 여부를 판단하지 않은 채 판결을 냈기 때문이다.

훗날 신군부가 날조한 김대중 대통령 내란음모 사건의 단초가 된 것도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힌 한민통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작성했던 보고서 등 2000쪽 분량의 자료를 재판부에 전부 냈습니다. 재판부가 다 읽어봤다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오히려 오늘 판결하면서 ‘반국가단체’라는 말을 몇번이나 하더라고요.”

 

김씨는 “대한민국 사법부가 현대사의 오점을 바로잡을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개탄했다.

“반국가단체라면 최소한 강령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어요. 이중간첩의 증언이 조작됐다는 증거도 다 있었는데….”

 

그는 이날 선고를 듣고 나서 국립묘지에 있는 김 대통령의 묘역을 찾았다.

“묘소 앞에서 ‘100% 완벽하게 대통령님의 억울함을 풀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어요.”

 

그는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 무죄와 원상회복을 위한 모임’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신과 같은 피해를 본 재일동포 160명의 ‘신원’을 돕고 있다고 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