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사랑과 지성의 공동체를 위하여

道雨 2012. 2. 7. 11:43

 

 

            사랑과 지성의 공동체를 위하여

 

 

진은영 시인

 

2009년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작가선언 6·9’ 활동을 하기 전까지 송경동 시인을 잘 몰랐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사실은 두 가지뿐이었어요.

 

하나는 그가 노동자 시인이라는 것.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을 읽으면서 그 시인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대학 시절 읽었던,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들은 나에게서 멀리 있는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려주었다면, 송경동의 시에는 지성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놀랐고, 놀랐다는 사실에 금세 부끄러워졌습니다.

지성이나 분석력, 통찰은 대학에서 전문적이고 제도적인 훈련을 받은 학자들의 것이지 노동자 시인에게서 기대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었던 듯합니다.

작가선언을 통해 함께 일하고 대화하면서 편견은 깨졌습니다. 그는 우리들 중 가장 논리적이고 명징한 어휘로 이야기를 이끌고 일을 합리적 방향으로 가져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송경동에 대해 또 하나 알고 있었던 사실은 그가 내 대학선배의 남편이라는 것.

유난히 흰 얼굴에 늘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듣고는 조금 걱정했습니다. 노동자에다 시인이며 투쟁 현장마다 쫓아다니는 운동가인 사람. 그중 한 가지만으로도 참 힘든 사랑이었을 텐데 그 삼중의 버거움을 극복할 만큼 그녀를 용감하게 만들어버린 그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계급·계층을 넘어서는 사랑은 할리우드의 신데렐라 스토리에서나 가능할 거라는 나의 비관주의를
송경동은 희망버스로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모두가 그에 대해 아는 사실 하나.

그는 ‘희망버스’의 기획자이고 그 때문에 지금 감옥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구속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희망버스의 기획은 그의 지성과 사랑의 능력이 가장 크고 멋지게 발휘된 일입니다.

구조조정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일터에서 내쫓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리고 부당함에 대해 맞서 싸우며 스스로를 지키는 일은 정당합니다. 또한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직접 만나 지지하는 일은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지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1차 희망버스를 타고 750명이 영도조선소에 다녀온 뒤, 그는 2차 희망버스를 85대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처음 그의 제안을 들었을 때 당황했어요. 대체 그 많은 버스를 누구로 채우려고? 텅텅 빈 버스가 출발도 못 하고 광장에 서 있을 상상을 하니 깜깜했습니다.

자기 일로도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세상인데 남의 일터를 지키는 일에 그 많은 사람들이 과연 움직일까?

그런데, 움직이더군요. 송경동의 확신처럼 버스 85대를 가득 채우고 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갔어요. 자기의 이해관계와 무관한데도 타인을 염려하고 그들의 고통을 나누려는 감정은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희망버스가 보여준 사랑은 지성적인 사랑입니다. 희망버스의 탑승자들은 해고당한 노동자들의 형편이 딱하니 쫓겨날 그들을 위해 이웃사랑의 성금을 전달하자고 그곳에 간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싸움과 연대가 필요함을 아는 사랑은 빛나도록 지성적인 사랑입니다.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 그런 일들을 한두 번 외면하고 방기하다 보면 그 부당함의 사슬이 결국 우리를 휘감게 된다는 것을 배우러 그곳에 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희망버스는 지성과 사랑을 교육하는 학교입니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버스를 탔습니다.

“네가 살면서 아무리 크고 무서운 불의를 만나더라도 눈감지 말고 싸워라. 너는 이길 수 있고 함께할 친구들이 반드시 있어.”

희망버스가 도착한 곳에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그것을 배웠어요. 송경동은 정진우와 박래군과 더불어 우리를 그런 멋진 삶의 학교에 보내 준 기획자 중 한 사람입니다.

 

나는 계급·계층을 넘어서는 사랑은 할리우드 영화의 신데렐라 스토리에서나 가능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빛나는 지성과 인간성에 대한 통찰은 제도화된 교육기관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송경동은 희망버스를 통해 사랑에 대한 나의 비관주의와 배움에 대한 착각을 고쳐주었습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어요.

“어린아이는 현실주의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듯 그렇게 배와 사과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기에.”

 

송경동은 최고의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는 돌아가면 만날 수 있는 아내와 아이의 존재를 확신하듯 모순의 극복 가능성과 진실의 실현 가능성을 확신합니다. 그가 무죄판결을 받도록 2월7일 재판에서 지성과 사랑을 겸비한 공정한 판사가 선임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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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하는 곳에 폭력은 없다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 민교협 의장

송경동의 죄라면 타자의 고통에 깊이 공감한 것뿐. 그 공감에 상 주지는 못할망정 단죄한다면…

 

학교폭력이 심각하다. 피해 학생들이 연이어 자살하는 일은 슬픔을 넘어 충격이다.

얼마나 폭력이 심하고 견디기 힘들었으면 그들은 부모에게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자살을 선택하였을까.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들이 겪었을 슬픔과 고통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더 큰 문제는 이 폭력이 모든 한국 학교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현재진행형의 일상’이라는 데 있다.

이에 여러 대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교육을 시행하는 것이다.

 

지금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는 ‘학교 폭력 0%’를 목표로 ‘공감의 뿌리’(Roots of Empathy)란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초등학교나 유치원에 아기를 데려와 담요 위에 놓으면, 아이들이 이를 지켜본다. 아기가 우유병을 향해 걸어가다가 넘어지는 순간 아이들도 함께 가슴이 아픈 경험을 한다.

아기의 고통과 성취에 공감하는 학습을 통하여 아이들은 점점 내 가슴이 아프면 타인의 가슴도 아픔을 깨닫고 공유한다.

 

이 교육 이후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학교폭력이 90%나 줄어든 것이다. 더 나아가 제시라는 연약한 여자아이가 다른 아이의 모자를 빼앗은 남자아이한테 맞서서 당당하게 모자를 돌려주라고 말하는 식의 일이 교실에서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공감의 뿌리’ 교육에서 확인한 것처럼, 인간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350만년 동안 사회적 진화를 거듭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몸 안에 담고 있으며, 이는 교육과 참여를 통해 얼마든 신장시킬 수 있다. 제시의 사례에서 보듯, 진정한 정의와 용기 또한 바로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서 비롯된다.

 

 

작년에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던 희망버스도 유사한 사례다.

20명이나 자살과 병으로 숨질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 있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노동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를 모색하였고, 송경동 시인은 이를 희망버스로 꾸려내었다.

정리해고 노동자와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통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휴일을 반납하고 자기 돈까지 들여가며 부산으로 달려와 국가폭력에 맞서며 거리에서 밤을 새웠다.

결국 사태는 원만하게 해결되어 노사가 타협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은 309일 만에 85호 크레인을 내려와 땅을 밟았다.

 

희망버스를 주도한 송경동 시인은 공감능력이 유달리 뛰어난 사람이다. 폭력을 당한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시위 현장에 그는 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쓴 시는 “낮고 어두운 세계에 대한 연민과 희망의 미학을 새롭게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았고, 천상병 시문학상과 신동엽 창작상을 받았다.

그의 죄라면 타자의 고통에 깊이 공감한 것뿐이다. 그 공감에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늘 오후에 있을 공판에서 단죄한다면, 사법부야말로 국가폭력을 대행한 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20세기가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극단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공감과 연대의 세기가 되리란 것을 확신한다. 그러지 않으면 공멸이 확실할 정도로 환경, 자원, 격차, 갈등, 소외 등 여러 분야에서 인류 문명은 임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학교폭력, 국가폭력, 테러리즘, 요한 갈퉁이 말하는 구조적 폭력으로 우리의 삶은 너무도 곤고하고 하루도 평안하지 못하다.

가정, 학교, 사회, 국가 등 곳곳에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늘려갈 때,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처럼 공감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리더가 될 때, 우리는 폭력이 없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 민교협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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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보시인 송경동의 싸움은 무죄다

법정에서도 계속되는 '싸움'... 희망버스는 필요하고 옳은 것

 

프린스의 노래 "때로는 4월에도 눈이 온다네"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트레이시는 언제나 사랑 때문에 울었어. 고통 때문에 운 게 아니었어… 트레이시처럼 우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야." 난 이 노래를 들으면 송경동 시인이 생각난다. 그는 소문난 울보다. 내 앞에서도 두 번을 울었다. 그런데 두 번 모두 자기 연민이나 삶에 대한 회한 때문에 울지 않았다. 한 번은 시를 읽고 난 후 울었고 다른 한 번은 오래 전에 죽은 동료 생각 때문에 울었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다. 아마 그는 감방에서도 울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울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오는 수많은 편지들을 읽으면서 울고 있을 것이고 답장을 쓰며 울고 있을 것이고 희망버스 이후에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희망 텐트와 희망 뚜벅이 운동 소식에 울고 있을 것이고 얼마 전 사망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소식에 울고 있을 것이다. 트레이시처럼 그 또한 사랑 때문에 울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그런 울보 시인도 없을 것이고 울보 수감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송경동 시인은 법정에서는 울지 않을 것이다. 법정에서 그는 여전히 동료들과 함께 싸움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1차 공판 때 자신과 희망버스 운동이 무죄임을 당당히 밝혔다. 그는 한진 중공업의 정리해고는 노동자들의 존엄, 심지어는 생명에 대한 일말의 배려도 없이 사측이 일방적으로 단행한 폭력적 조치였다고 역설하였다. 희망버스 운동은 귀를 닫아버린 사측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시민사회의 참여와 정치권의 관심을 촉구할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문제제기였다고 역설하였다.

 

나는 송경동 시인을 비롯한 참여자들이 재판정에 서 있고, 그들이 그곳에서도 지난해 거리에서 했던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버스 운동의 연장이라고 본다. 애초부터 희망버스 운동은 우리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노동과 자본, 민중과 권력 사이의 본질적인 불평등을 문제 삼고 이러한 불평등 구조 하에서 "함께 희망을 꿈꾼다는 것"을 기획하고 구현하려는 집합적 노력이었다.

 

'노동자 보호하는 제도' 전무한 사회... 그들을 돌려보내라

 

나는 희망버스에 참여하면서 목격하였다. 소위 폴리스 라인은 부산시의 공공장소로부터 시위대를 분리하기 위해 그어진 것이 아니었다. 폴리스 라인은 한진 중공업이라는 사유지와 시위대를 분리하기 위해 그어진 것이었다. 경찰은 마치 희망버스 참여자들이 한진 중공업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위원과 농성 노동자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대단한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촛불집회 때 청와대를 지키는 것처럼 한진 중공업을 수호했다. 그런데 가당찮게도 지금 법정에서 검찰은 '공공'의 이름으로 희망버스 기획자들을 처벌하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희망버스 참여자들이 지난해 여름 이후 내내 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면서 그러했던 것처럼 무엇이 '공공의 이익'인지 사법권력과 대치하면서 공방하고 입증하는 싸움이다.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 정의와 공공의 이익을 둘러싼 싸움이 거리에서 곧바로 법정으로 직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라는 자본의 무자비한 칼날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제도와 정책이 전무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민주주의적 권리와 아무 상관없는 무능력한 이들의 제몫 챙기기로 치부해버리는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송경동 시인과 같은 거리의 투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부와 정당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데 있어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한 상황에서, 소위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폴리스 라인이 실은 자본의 사유지를 지키기 위해 그어지는 상황에서 법정은 두 번째 부산 거리, 두 번째 신영도 대교, 두 번째 한진 중공업 앞 대로일 뿐이다. 요컨대 송경동, 정진우, 박래군은 법정에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법권력이 그은 잘못된 치안의 분할선을 고쳐 긋는 자들이다.

 

그들을 지지하는 나는 주장한다. 송경동과 정진우와 박래군의 싸움은 무죄일 뿐더러 이 사회에서 필요하고 옳은 것이었다. 경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재벌을 위해 온갖 특혜 정책을 베풀고 있는 이 정권에서 희생당한 노동자 친구들을 위해 시민들과 함께 모여 호소하고 노래하고 행진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소란'이란 말인가? 2차 공판을 앞두고 나는 검찰과 재판부에 말한다. 이제 그들을 당신들이 지키려 한다는 그 공공의 질서로부터 놓아줘라. 우리가 보기에 거기는 법정이 아니라 당신네 친구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당신들이 제멋대로 선을 그어놓은 또 다른 거리일 뿐이다. 우리는 그 거리의 질서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을 친구들의 품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라.

 

나는 울보 송경동을 떠올리며 그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이 그립다. 당신이 친구들 앞에서 징징대며 시를 읽고 노래를 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당신은 계속 싸워야 하고 우리는 당신의 싸움을 지지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해 부산으로 떠나는 길을 당신에게 맡겼었다. 그러니 당신이 부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도는 이제 우리가 맡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