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전까지 방송 돌려 놓겠다”
제작 거부 찬반투표 앞둔 언론노조 김현석 KBS본부장과 총파업 들어간 정영하 MBC본부장… “잃을 게 없다” “세게 싸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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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분노가 들끓고 있었던 거”
자본주의국가에서 가능한 일일까? 바로 지금, 2012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것도 ‘유이한’ 공영방송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이 판박이처럼 똑같이 겪는 일이다. 두 회사 모두, 정권에서 파견한 경영진은 뉴스와 프로그램에서 균형과 공정성을 거세했다. 정권에 반하는 내용은 굵직한 특종도 묻혔다. 정권 친화적인 내용은 직원들이 제작을 거부해도 외주 제작사를 통해 기어이 만들어졌다. 균형감각과 공정성이 빠진 방송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이런 찐빵을 즐겁게 사먹을 소비자는 없다. 그런 찐빵을 먹으라고 내놓은 생산자의 속도 까맣게 탈 노릇이었다. 오래 참은 분노는 결국 터졌다. 문화방송 노동조합은 지난 1월30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갔다. 한국방송 기자들도 제작 거부를 위한 찬반투표를 앞두고 있다. 도대체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지난 2월8일 오전, 서울 여의도동 문화방송 사옥 노동조합사무실에서 두 노조위원장을 만났다. 전국언론노동조합 김현석 한국방송본부장과 정영하 문화방송본부장이었다. 이날 아침 영하 12℃의 추위에 서울은 온통 얼어붙었다. 한기를 잔뜩 머금은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뜻밖에도 언뜻언뜻 스쳤다. 무거운 책임을 떠안은 노조 지도자의 표정으로서는 뜻밖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증은 풀렸다.
분위기가 어떤가.
김현석 본부장(이하 김) 어제(2월7일) 저녁 한국방송 기자협회에서 긴급 기자총회를 열었다. 제작 거부 찬반투표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투표에 참여한 222명 가운데 86%, 그러니까 191명이 찬반투표를 하자고 답했다. 기자협회에는 간부들도 다수 있다. 비율이 예상보다 높게 나왔다.
정영하 본부장(이하 정) 문화방송은 2010년에도 39일 동안 파업을 했다. 불과 2년 만에 다시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피로도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파업 찬반투표에서 찬성률이 77.6%였다. 2010년 파업 찬성률보다 오히려 1.7%포인트 높게 나왔다. 노조원들의 열의가 높다.
반응이 뜨거운 이유는.
김 분노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구성원들의 분노가 눈에 보였다. 이번엔 달랐다. 춘천방송총국에서 지난해 11월 서울 본사로 돌아왔다. (김 본부장은 2008년 정연주 사장 불법 해임 이사회 반대투쟁을 하다가 춘천으로 전보됐다. 당시 보복성 인사라는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보도국이 너무 조용해졌다. 후배들도 말을 안 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떠들었다. 일부러 후배들한테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겉모습만 조용했다. 울분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정 2010년 39일 동안 파업을 하면서 구성원들이 김재철 사장에게 크게 실망했다. 직원들이 목소리를 모아 파업을 해도 사장은 귀를 닫았다. ‘사장이 결국 문화방송을 말아먹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뒤에 조직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일만 했다. 이걸 ‘진실피로증’ ‘진실기피증’이라는 말로 표현하더라. 비상식적인 상황을 고칠 수도 없는 상태가 되면, 대면하기 싫으니 각자의 일에 몰두하게 되는 현상이라는데. 그렇게 노조원들은 각자 가슴앓이를 했다. 집 안에서 쓰레기를 며칠만 안 치워도 차고 넘친다. 성원들 가슴속에 응어리가 해소되지 않고, 너무 오래 남았다.
“무엇보다 집권자의 의지 때문”
김 언론개혁시민연대에서 지난해 낸 자료집을 보면, 한국방송의 본부장 신임평가제의 기준이 비현실적이라는 대목이 있다. 재적 인원의 2분의 1이 불신임하면 본부장에 대한 인사 조처를 요구하고, 3분의 2가 불신임하면 해임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인데,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1월 고대영 보도본부장에 대한 불신임 투표에서 불신임 비율이 재적 조합원 대비 70%가 넘었다. 모두 속으로 분노가 들끓고 있었던 거다. 괜히 떠들고 다녔구나 싶더라.
언론 통제가 어느 정도였기에.
정 일일이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큰 흐름만 얘기하겠다. 김재철 사장이 오고 나서 ‘말 잘 듣고 무능력한’ 간부들로 물갈이됐다. 우리는 그들을 ‘아바타’라고 부른다. 이 간부들이 사장의 뜻에 따라 순서대로 조직에 손을 댔다. 먼저 노조 활동에 적극적인 기자들을 대부분 보도국에서 몰아냈다.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민감한 이슈는 다루지 않고, 연성 기사만 다루도록 했다. 노사가 함께 참여하는 공정방송협의회를 통해 책임자들의 보직 변경을 요구했지만, 회사 쪽은 지난 11월 이후 협의회를 열지도 않았다. 그 다음에 회사는 PD저널리즘 쪽에 손을 댔다. 최승호 PD 등을
김 한국방송도 비슷하다. 그래서 문화방송의 얘기를 들으면 차라리 위안이 된다. (웃음) 정연주 사장이 정권의 무리수로 물러나야 했고, 이른바 관제 사장인 이병순 사장을 거쳐 김인규 사장이 왔다. 위에서 보도·편성권을 쥐고 보도 내용을 통제했다. 기자들이 아무리 특종을 들고 와도 보도가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권재진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스폰서 의혹을 단독 취재한 기자가 있었다. 회사는 “(의혹에 관련된) 카드 영수증을 갖고 와야 보도할 수 있다” “누가 말해준 거냐”고 물으며 오히려 해당 기자를 추궁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심층 취재를 하겠나. 기자들은 ‘그냥 관두자’고 취재를 접게 된다. 뉴스가 힘을 잃으니 제보도 안 온다. 당연히 탐사보도도 위축됐다. 어떤 교수가, 해마다 2조원 이상의 사회적 비용을 써가며 공영방송이 제대로 된 역할을 안 하고 불량품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통제를 누가 지시하나.
김 정권의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하지 않겠나. 2008년 정연주 사장이 해임될 때,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을 중심으로 ‘KBS 대책회의’가 열렸다. (2008년 8월11일과 17일 두차례에 걸쳐 서울 롯데호텔에서 당시 최시중 위원장, 정정길 청와대 비서실장,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등이 비밀 회동을 한 사실이 그해 국정감사에서 뒤늦게 밝혀졌다. 이 자리는 8월11일 해임된 정연주 사장의 후임을 정하기 위한 자리로 알려지면서 파문을 낳았다.) 그 뒤에 선택을 받은 인물이 김인규 사장이었다. 김 사장은 흔히 ‘특보사장’이라고 불린다. 당사자는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다. (웃음) 특보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 한나라당 방송전략실장이었다. 당시 BBK 의혹과 관련해 해명하려고 당시 김 실장이 한국방송을 찾아온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도 특보들을 무더기로 ‘거느리고’ 다녔다.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거물이라는 얘기다.
정 이 대통령과 친한 것으로 치면 김재철 사장도 못지않다. (웃음) 2007년 9월 당시 울산문화방송 사장이던 김 사장에게 모친상이 있었다.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상갓집까지 직접 찾아왔다. 현재 공영방송에 문제가 생긴 원인은 무엇보다 집권자의 의지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는 김재철 사장 등 집권자의 의중을 관철하려는 이들의 무리수도 작용한다. 김미화, 김제동 같은 이른바 소셜테이너까지 무리하게 하차시키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정무적으로 판단하고, 신중하게 결정할 문제도 무조건 밀어붙이고 본다.
“사장이 누구든 흔들리지 않을 조직문화 절실”
방송 파행의 상처도 여러모로 클 것 같다.
정 방송을 제대로 바꾸는 게 한계가 있었다. 시청자에게, 국민에게 죄송할 뿐이다.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대화로 방송을 지키려 했지만 오히려 탄압받고 유린당했다. 조직 안에 상처는 말도 못하게 남았다. 조합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저항하겠다는 의지다. 2000년 이후에 입사한 후배들도 2년 전 파업을 거치며 많이 단련됐다.
김 속된 말로 쪽팔려서 한국방송을 못 다니겠다. 시청자에게 부끄럽다, 석고대죄한다는 말도 더 이상 못하겠다. 이제는 프로그램으로 보여줘야 한다. 후배들과 함께 좋은 방송을 만들자고 했다. 정권이 바뀌기 전에 한국방송이 먼저 방송을 바로 되돌려놓아야 한다. 좋은 방송은 제도가 좋다고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고, 통치자가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누가 집권하더라도, 사장으로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번엔 정권이 바뀌기 1년 전부터 바꾸려고 한다. 그런 힘을 내부적으로 축적하려고 한다.
정 지난 4년간 공영방송에 새겨진 가장 큰 오점은 집권자가 언론을 장악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내년에 야당이 집권하더라도 방송을 장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집권자의 의지, 방송사 구성원들의 의지와 올바른 제도가 기본적으로 받쳐줄 때 공영방송이 흔들리지 않고 자리잡을 수 있다.
김 한 교수가 ‘정보난민’이라는 표현을 쓰더라. 공론의 장에서 공영방송이 신뢰를 상실했다. 사람들은 진실을 찾아 ‘나꼼수’ ‘뉴스타파’를 찾아헤맨다. 우리 방송에서 할 일을 못하니까 생기는 일이다.
파업의 귀결은.
김 2008년에는 총파업을 하며 처절하게 지자고 후배들에게 말했다. 후배들이 우리는 왜 만날 싸움만 하면 지냐고 묻기도 했다. 그래도 상대편에게 상처를 줘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상처를 입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음 싸움을 위한 바리케이드를 만들어두자고 했다. 이번 싸움에서는 우리가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 사장을 바꿀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바꾸지 않더라도 최소한 식물인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잃을 게 없다. 재미있는 싸움이 될 것이다.
정 지난 4년 동안 노조에서는 처절한 기억밖에 없다. 지금까지 판판이 깨졌다. 그런데도 노조원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집행부가 경험이 많아서도 아니고, 위원장이 카리스마가 있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회사 쪽이 생각이 복잡할 것이다. 사장이 열흘째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다. 세게 싸울 생각을 하니까, ‘패’가 꼬이지 않는다.
“여러분, 우리 사장님을 찾아주세요”
대담이 진행된 문화방송 사무실의 한쪽에는 노조가 시민선전용으로 만든 전단이 마련돼 있었다.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큼지막한 제목이 붙은 전단지에는 “MBC 노동조합이 공정방송하자고 파업하는데, 사장님은 출근 안 하시고 종적이 묘연합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사장님을 찾아주세요”라는 내용과 함께 김재철 사장의 얼굴 사진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이날 오후 문화방송 노동조합원들은 이 전단지를 서울시내 곳곳에서 뿌리며 선전전을 벌였다. 김 사장은 평상시 “공정방송 하지 못하면 나를 한강에 매달아서 버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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