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유토피아를 꿈꾼 어린왕자의 실용과 창의

道雨 2012. 3. 13. 15:53

* 이 글은 문화재청에서 발간되는 [문화재 사랑]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다. 이루어진다해도 어려서의 꿈이 성인이 될 때까지 유지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어렸을 적에 아주 강한 경험이나 계기가 있을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대부분 성장하면서 꿈도 성장하게 마련이다. 꿈을 꾸고 있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 꿈은 구체적으로 되며 수차에 걸친 수정과 보완으로 그 완성도 또한 점점 높아진다. 과학적인 설계와 독창적인 생각으로 ‘수원화성’을 건립한 조선의 왕, 정조(正祖, 1752~1800)가 그러했다. 수원화성에는 과학적인 설계개념인 탄탄한 ‘기본’ 아래 독창적인 디자인인 ‘새로운 상상력’이 숨어 있다.

 

정조의 큰 뜻, 수원화성으로 빛나다
정조는 어려서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억울한 죽음을 경험케 되고 그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과 북인의 이어진 당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 말조심, 행동조심 등 외부로 나타나는 모든 행위들을 절제 또 절제하였다. 세상에 믿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자신과 서책을 통한 간접적 경험만이 그를 보호하고 성장케 하는 디딤돌이라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검증하였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강하게 하고 자신의 존재의식과 가치를 높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무예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왕위에 오르자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칭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바꾸고 수원읍치 근처의 화산으로 이장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수원화성의 축성을 구상하였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성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어릴 적부터 보고 느껴왔던 사색당파에 의한 정치를 마감하고 혁신정치를 하기 위함이다. 물론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융릉을 참배하려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이유이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왕권 강화이다. 그동안 중앙은 서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왔는데, 그 기반이 중앙상권이었다. 이를 인식한 정조는 교통이 사통팔달한 화성에 새로운 거점을 만들고 싶어 한 것이다. 정조는 화성을 도성에 버금가는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배치한다. 그 후 1794년부터 축성을 시작하게 되는데, 축성 계획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맡았다. 다산은 그동안 축성된 국내성들은 물론 중국성의 장점 등을 참조하고 많은 서적과 연구를 통해 기존의 성과는 다른 새로운 방안을 제시한다. 성의 규모에서부터 축성방법, 시설물의 종류 및 형태까지 정하였는데 이는 방어와 공격을 대비한 최상의 계획이었다. 축성을 담당한 총 책임자는 채제공, 공사 책임자는 조심태였다. 화성축성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너무 서두르지 말 것, 둘째, 화려하게 하지 말 것, 셋째 기초를 튼튼히 할 것 등이다.

 애민사상愛民思想과 공사실명제
또한 축성에 임하는 노역자들에게는 철저하게 임금을 지불하였다. 심지어는 반나절 일한 사람에게도 임금을 지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너무 춥거나 더운 날에는 일을 시키지 않았으며 보너스로 특식(술, 떡 등)과 하사품(부채나 모자 등)을 지급하였고 더위를 이기기 위한 일종의 보약(척서단)을 주었다. 그동안 국역 일을 하면서 노임은 커녕 인간적인 대우조차 받아보지 못했던 노역자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자발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하였을 것이다. 어떤 일을 수행함에 있어 총괄계획가가 추구하는 대로 일이 잘 되기 위해서는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이곳 화성축성에 있어서 필요충분조건이 잘 맞아 떨어진 것이다.

한편 인간적 대우를 받은 노역자들은 일한 것에 대한 철저한 책임과 의무 및 권리를 동시에 부여 받았다. 반면 부실하게 시공된 곳에 대하여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받았다. 즉, 각 공사구간별로 누가 감독을 하였고 어떤 일에 누가 참여하였는지를 표석에 남김으로써 책임실명제를 시행한 것이다.

 

실학정신 반영과 건설자재
서양의 과학기술 및 새로운 정보를 도입하였으며 거중기, 유형거, 녹로 등 장비를 개발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이동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공기를 단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축성에 필요한 자재 중에 가장 비중이 큰 석재의 경우 인접한 숙지산 등에서 채취하여 사용하였다. 기와와 벽돌은 현장 근처에서 직접 가마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동안 축성을 하면서 벽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경우는 드문 일이나, 화성축성 시 성 하단에는 커다란 석재를, 상단에는 중국 성곽의 장점 등을 참고하여 벽돌을 적당히 가미하였다. 이는 화포 공격을 받을 때 석재는 많은 파편이 생겨 아군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나 벽돌의 경우 완충작용을 할 수 있고 또한 석재에 비해 벽돌의 무게가 가벼워 축성공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목재의 경우는 서해안 안면도에서 벌목한 것을 주로 사용했으며 일부는 강원도에서 가져왔다.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은 정조 18년(1794년)정월 팔달산에 올라가 둘러본 후 명명하였다. 수원화성 축성은 정조 18년 2월에 시작하여 1796년 9월에 끝이 났다. 성곽의 총 길이는 약 5.74킬로미터이고 성벽의 평균 높이는 약 5~6미터이다.

전통문화를 지탱하는 선조의 기본과 상상력
수원화성은 하나의 성이지만 수많은 시설들이 서로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 제 역할을 철저하게 담당하고 있다.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신도시를 만든 정조는 화성축성 중간에 흉년으로 백성들이 살기가 어렵게 되자 성역을 중지하고 화성 북쪽에 대규모 저수지(지금의 만석공원 부근)를 만들고 농지를 만들게 하였으니 이것이 만석거이다. 만석거는 수원화성 신도시를 자족 도시로 만들기 위한 생산기반이기도 하다. 이외에 축만제(지금의 서호저수지), 용주사 근처에 만년제 등을 만들어 신 농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로 인하여 수원에 농촌진흥청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보물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이다. 화성성역의궤는 1794년 축성 시작부터 1796년 완공 시까지 축성과정을 기록한 공사보고서로, 내용이 상세하고 사실적이어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 선조들이 탄탄히 쌓아온 기본과 독창성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비단 수원화성만은 아니다. 백제 문화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백제금동대향로는 화려한 꽃 한 송이가 봉오리를 맺은 듯하다. 그 형상 안에는 그 시대의 도교와 불교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고, 더불어 빛나는 과학적인 설계를 지니고 있다. 또 신라의 석구石構인 경주 포석정은 어떠한가. 굽이쳐 흐르는 물길의 오묘함 속에는 과학적 설계가 바탕이 되어 유려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보여준다. 과학적인 설계와 독창적인 디자인은 어느 순간 툭 튀어나와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체계적인 상상력과 실무자들의 인간적 대우, 그리고 그들의 진심이 합해져 비로소 가장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우러짐의 미학은 이론적인 것이 아닌 함께 동행했을 때 이루어진다. 이런 것들이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원화성은 실학사상의 기반 위에 빛나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글•사진•김동훈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교수, (사)화성연구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