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김성일 선생 종택에서 하룻밤 머물고 나오면서 비치된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사랑채 제비처럼 처마 밑에라도 깃들고 싶다.”
그건 학봉의 제봉과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1592년 임진전쟁 때 전장으로 떠나면서, 의병장 제봉 고경명 선생은 식솔을 학봉 종가에 맡겼다. 그해 제봉은 금산전투에서 첫째, 둘째 아들과 함께 전사했고, 학봉 역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 성을 지키다 병사했다.제봉의 뜻을 따라 셋째 아들 용후가 이끌고 간 식솔은 50여명.
학봉의 부인과 자식들은 이들을 식구로 받아들였고, 잠잘 곳과 양식과 땅을 마련해주었다. 제봉 일가는 그곳에서 4년 반 동안 지내다가 귀향했다.
용후는 학봉의 손자 김시권과 연배가 같았다. 둘은 1605년 나란히 대과에 합격했고, 용후는 1617년 안동부사로 부임해 인연을 이어갔다.
13대손 고재오 전 충효부대장은 10여년 전 종택 입구에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 한 그루 심었다. 영호남의 기개 높은 두 선비 집안의 정리가 굳고 깊다.
사랑채 기둥엔 제비집 받침이 줄지어 있다. 거기에 깃든 제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어 종택은 연택이었다. 그렇게라도 깃을 들고 싶었던 것은 사실 학봉 종택에 들면서 나를 감싸던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큰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 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13대 종손 김용환 옹의 외동딸 김후웅씨가, 부친 대신 건국훈장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토로한 회한이다.(‘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김용환 옹은 개화기 대표적인 파락호였다.
윤학준씨(전 일본 법정대 교수)는 개화기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 운동을 주도했던 김남수와 함께 김 옹을 꼽았다.
김 옹 역시 주변의 손가락질 속에서도 속내를 한번도 털어놓지 않았으니, 자연 파락호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김 옹은 21살 때 이강년 의병부대에 가담했고, 병탄 직후엔 김상태 의병부대에 참가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안동으로 압송됐고, 1921년에는 만주 길림의 서로군정서 군자금 조달 단체인 의용단의 서기로 활약하다가 1922년 일경에 세 번째로 체포됐다.이후 김 옹은 안동의 소문난 노름꾼으로 돌변한다. 노름판돈으로 문중 전답 700두락(18만평)을 날렸고, 종택마저 팔아먹었다.
문중에서 가문의 위신 때문에 돈을 갹출해 두 번씩이나 종택을 되사서 김 옹의 이름으로 등기했지만, 그때마다 종택은 노름 밑천이 되어버렸다.
오죽했으면 외동딸이 시집갈 때, 사돈이 김 옹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겨 새색시에게 보내온 농 값까지 노름으로 날렸을까.
문중이건 이웃이건 김 옹을 손가락질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때마다 김 옹은 이렇게 대꾸했다.
“한 집안에서 학봉과 난봉 두 봉황이 났으면 되지 않겠는가?”
김 옹은 194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사연을 말하지 않았다. 1980년대까지 그가 3대 파락호로 꼽힌 까닭이었다.
김 옹이 열살 때인 1896년 7월22일. 그의 삶을 뒤흔든 사건이 벌어졌다.종택을 급습한 일경은 그곳에 숨어 있는 김회락 의병포대장을 체포했다. 그는 11대 종손 서산 김흥락 선생의 4촌이었다. 분개한 일경은 마루를 뜯고 집안 가재도구를 패대기치고, 살림살이를 뒤집어 놓았다. 종손이던 서산 선생은 일경에 의해 포박당한 채 사랑채 앞 큰마당에 무릎 꿇고 있었다.
서산은 학봉의 종손이자, 퇴계학통의 정맥을 이어받은 안동 유림의 큰 스승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당한 능욕을 김 옹은 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이 퍼지자 안동 유림과 의성 김씨 일가가 들고일어났다. 707명에 이르는 서산 선생의 제자 대부분은 항일운동에 나섰다. 이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훈포장을 받은 사람만 60여명이나 됐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도 여기에 포함됐다.
의성 김씨 집안에선 27명이, 그리고 학봉의 직계손만 11명이 건국포장을 받았다.
김 옹도 성년이 되자마자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고, 요시찰 인물로 찍혀 운신이 힘들어지자,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을 찾아야만 했다.
건국훈장 추서에는 이렇게 명기돼 있다.
“의용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종가의 세전 재산을 팔아 독립군 자금을 마련해 만주의 이상용에게 전달했다. 재산 매각 자금을 노름판에서 잃은 것으로 인정받기 위해 평생 노름꾼, 파락호로 위장했다.”
120년 전 서산이 능욕을 당했던 큰마당 곳곳엔 석창포가 자라고 있다. 학봉이 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뿌리 구해 기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귀국 후 선조에게 올린 보고 내용을 놓고 여러 논란이 있지만, 학봉은 겁박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면전에서도 조선 선비의 자존심과 기개를 보여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사간원 정언 시절 ‘짐을 평가해보라’는 선조의 하명에 “왕께서는 요순(성군)이 될 수도 있고, 걸주(폭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던 그였으니, 도요토미의 겁박에 주눅들 리 없었다.
일본 근대성리학의 개조 후지와라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듣고 방문해 시를 나누며, 퇴계학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임진년 왜군이 침략하자, 학봉은 곡창인 호남의 관문 진주성으로 내려간다.
남명 조식 선생에게서 민본주의 세례를 받은 그는, 관군보다 민중을 믿고 그 힘을 모으는 데 주력했다. 명군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 결과 당시 전국의 의병 가운데 반수 이상이 학봉 휘하에 있었다.(선조실록)
학봉이 민중의 아버지로 존경받게 되는 까닭이다.
학봉이 오자 산속에 피신했던 판관 김시민도 성으로 돌아와 수성태세를 갖췄고, 관군은 성 밖의 최경희 등 호남 의병과 곽재우, 김준민 등 경상 각지의 의병과 협력체제를 갖췄다.3만여 왜군에 맞서 거둔 진주대첩은 학봉이 주도한 이런 민관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학봉은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분투하던 중 병사한다. 그가 죽고 2개월 뒤 진주성은 왜군에 함락됐다.
훗날 광해군은 제문과 제수를 내려 흠향을 빌었다.
“하늘이 뽑은 호걸, 신이 내린 신령스러운 사람/ 덕을 갖추고 문장까지 뛰어난 우뚝한 명신/ 왕명을 받들어 사신을 가니 섬 오랑캐 혼이 빠지고/ …몸을 달려 전장을 누비기를 목숨이 다해서야 그만두었네.”
종택은 건물만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등 90여칸에 이른다. 학봉 기념관인 운장각에는 총 1만5000점의 유물이 소장돼 있고, 이 가운데 503점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비록 국가문화재는 아니지만, 종가에서 귀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보물이 있다. 15대 종부인 이점숙씨가, 1566년 퇴계가 학봉에게 전해준 ‘병명’을, 3년 동안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제작한 12폭 병명병풍이다.
병명이란 학맥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퇴계는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공자·주자에 이르는 심학의 요체를 손수 정리하고 써서 29살의 학봉에게 전했다.
풍뢰헌(風雷軒)은 3대 종손 김시추 옹이 지었다.
‘선한 것을 보면 바람이 몰아치듯 즉시 실행하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되 우뢰처럼 신속히 고쳐야 한다’는 뜻이다. 학봉이 세운 가풍이기도 하다.
돈과 권력 앞에서 언제든 영혼을 팔아버리는 파락호의 세태.
그 속에서 학봉 종택의 제비처럼 그 처마 밑에라도 둥지를 틀 수만 있다면 이 어찌 영광이 아니겠는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