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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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원교는 꾸미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다. 임진부작위(任眞不作爲)라, 본래 제 모습에 충실할 뿐 꾸미지 않는다는 것을, 글과 글씨 그리고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의 글씨와 글이 때론 직정적이고 때론 한없이 유장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는 글씨를 쓸 때 가객으로 하여금 노래를 하게 하였다. 노래가 우조이면 우조의 분위기로, 평조에 이르면 평조의 분위기로 글씨는 흘러나왔다. 그는 의기와 정조의 표현, 원칙과 변화의 조화를 중시했다. 그가 완성한 동국진체는 아내를 잃고 유배지를 떠돌지 않았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만시 가운데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 것을 도망시(悼亡詩)라 했다.

죽은 이를 애도한다는 뜻이지만, 중국(진)의 시인 반악의 ‘도망’ 이래 그렇게 굳어졌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지아비가 부인에게 보내는 애달픈 헌사여서 조선의 도망시는 특별했다.

 

허균의 스승 손곡 이달(李達, 1561~1618)의 ‘도망’은 대표적이다.

“비단옷엔 향기 사라지고 거울엔 먼지 앉았네/ 문 닫자 복숭아꽃 적막한 봄일세/ 옛날처럼 그대 방엔 밝은 달빛 와 있는데/ 드리운 저 주렴 걷어 올리던 이는 누구였던가?”

절제된 애상이 가슴을 찌르지만 반악의 ‘도망’ 모작 시비에 휘말려 그 뜻을 잃었다.

 

효전 심노숭의 ‘동원’ 역시 곡진하다. 봄이면 딸과 들에 나가 쑥을 캐서 탕도 끓이고 나물도 무쳐 내던 아내였다. 아내는 죽으면서 쑥이 돋는 것을 보면 자신을 생각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듬해 상에 쑥이 올라온 것을 보고는 이렇게 썼다.

‘…그때 나를 위하여 쑥 캐주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그 얼굴 위로 흙이 쌓이고 거기서 새 쑥이 돋았구나.’

그러나 효전은 1년 뒤 도망시의 먹이 마르기도 전에 재혼했다.

 

영재 이건창은 삶과 시가 한결같았다. 유배를 당하고 돌아오니 아내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술잔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살평상엔 먼지만 가득히 쌓였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중문 안으로 들이지만/ 내 집에 있어도 손님만 같구려….”

영재의 삶과 문장은 어쩌면 집안 내력이었다. 영재의 7대조 할아버지 이진위는 각리 이진검의 넷째 동생이고, 각리의 넷째 아들이 바로 당대의 시서화 삼절 원교 이광사였다.

 

원교는 영재보다 120여년 전 ‘도망’ 한 편을 남겼다.

“… 천지가 뒤바뀌어 태초가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지리라/ … 당신의 한도 정녕 그러하리니/ 두 한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이광사. 전주이씨 덕천군파 왕족으로서 노론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몰락한 폐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하곡 정제두에게서 조선 양명학의 적통을 잇고, 서예에서 동국진체를 완성한 당대의 슈퍼스타였다.

그러나 그는 51살에 귀양을 떠나, 23년 동안 유배 끝에 절해고도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런 그의 비극의 절정엔 부인의 자결이 있었다.

 

 

1755년 51살에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나주괘서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다. 집안 어른들이 잇따라 역모에 휘말리던 터여서,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부인은 자식들에게 유서를 쓰고 식음을 전폐했다.

“이런 일에 휘말려 들었으니… 뭘 바라고 구차하게 살 것인가”, “서울 집을 팔고 바로 강화도로 들어가거라. … 사대부 냄새 피우지 말고 몸소 밭 갈아 먹어라. 남과 만나지도 말고 남의 비위에 거슬리게도 말며 단정히 살아라”.

단식 6일째 원교가 처형되리라는 소문이 들리자, 유씨는 들보에 목을 맸다. 남은 삼남매를 살리는 길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소문과 달리 원교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함경도 부령으로 끌려가면서 부인의 자결 소식을 한달 뒤에야 들었다.

유배지에서 그가 가장 먼저 쓴 것이 ‘도망’이었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유씨는 원교보다 9살 아래지만 속이 깊고 현숙했다. 부부금슬은 장안에 파다했다.

원교는 <망처문화유씨기실>에서 이런 일화를 전한다.

부인의 생일 때였다.

“내가 돌아보며 장난삼아, ‘오늘 태어난 이가 어찌 갑자기 웃고 말하며, 어찌 갑자기 키가 이리 커졌소? 또 젖을 먹지 않고 밥을 먹으며, 어찌 이리 신통하오? 그 조숙함이 고신씨보다 훨씬 낫구려.’ 식구들 모두가 다 웃으니 그대 또한 빙그레 웃었지.”

 

이런 일도 있었다. 둥그재 집엔 원교의 글씨를 받으려는 이들이 장사진을 쳤다. 그들은 담배며 생선이며 옷감을 들고 왔다.

원교가 그걸 받아오면 유씨는 대뜸 물었다.

“무슨 명목으로 받으셨소?”, “인정상 어쩔 수 없었소”라고 우물쭈물하면 부인의 훈계가 뒤따랐다.

“장부가 유순하여 이렇듯 맺고 끊질 못하면 무슨 일을 하시겠소?”

원교는 아내가 죽은 뒤 12년 동안 10편의 제망실문(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글)을 짓고, 실기 하나, 묘지명 하나를 지었다.

 

 

글에 나타나듯 원교는 꾸미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다. 임진부작위(任眞不作爲)라, 본래 제 모습에 충실할 뿐 꾸미지 않는다는 것을, 글과 글씨 그리고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의 글씨와 글이 때론 직정적이고 때론 한없이 유장한 건 그 때문이었다.

아들 영익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참는 것만이 미덕이 아니’라며 이렇게 말했다.

결코 자신을 속이려 하지 말며, 마음이 일어남을 억누르지 말라. 주의할 것은 방종이지 억지로 뽑아 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마음속의 한과 뜻과 기운을 있는 그대로 글과 글씨에 담았다.

 

마음속에 의기가 모아지고 감정이 일어나면, 사람은 말을 하게 되고, 말로 다 드러내지 못하면 탄식을 하고, 탄식으로 안 되면 노래를 하고, 노래로도 안 되면 손과 발로 춤을 추는 법.

글씨나 그림도 다르지 않았다. 평소 글씨를 쓸 때 가객으로 하여금 노래를 하게 하였다. 노래가 우조이면 우조의 분위기로, 평조에 이르면 평조의 분위기로 글씨는 흘러나왔다.

 

지리산 밑 천은사에서 일주문 편액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한때 감로사였으나, 중창을 하면서 구렁이를 죽였더니, 물이 마르고 화재가 자주 발생한다는 사연이었다.

그는 지리산 계곡을 굽이쳐 흘러가는 물처럼 글씨를 썼다. 이후 화재는 멎었고, 일주문에선 지금도 한밤 귀를 기울이면 신운의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의 편액 ‘해탈문’은 신덕사 동종의 비천문처럼 혼이 승화하는 형태고, 대흥사의 침계루 편액 글씨는 베고 있는 계곡물처럼 시원하고 유장하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처럼 엄정하지만 획 안에 칼날의 서기가 배어 있거나, 강진 만경루 편액처럼 꿈틀꿈틀 일렁이는 경우도 있고, ‘사언시’처럼 결구가 들쑥날쑥하고 기울기도 한다.

 

그는 ‘오랑캐’ 청의 글씨를 버리고, 중화 서체의 본으로 여겨진 위진의 왕희지 글씨를 모본으로 삼아 서예를 배웠다. 그러나 이렇듯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기와 정조의 표현, 원칙과 변화의 조화를 중시했다.

그가 완성한 동국진체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유배지를 떠돌지 않았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를 겪고 나서야, 그렇게 비웃었던 원교의 글씨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추사는 유배를 떠나면서 떼내도록 한 원교의 대흥사 대웅보전 글씨를, 해배되자 원교의 것을 다시 걸고, 제 것(무량수각)을 한 단 낮은 요사채(백설당)에 걸도록 했다.

 

원교는 부령에서 7년 만에 노론 대신들의 성화에 따라 진도로, 진도에서 다시 완도 옆 신지도로 이배된다.

그러나 신지도 유배객 51명 가운데 유일하게, 병영(송곡진) 밖인 금실촌 황치곤의 집에서 기거했다. 뒤뚱산이 아담한 병풍 구실을 하고, 앞개에 물이 들고 나는 모습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

원교는 그곳에서 동국진체의 전형인 원교체를 완성하고, 서예 평론 및 이론서인 <원교서결>을 썼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쳐, 창암 이삼만 등을 통해 호남에 동국진체가 뿌리내리게도 했다.

혜원 신윤복의 부친 신한평은 신지도까지 내려와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1급 유배객치고는 자유로웠다.

 

그러나 ‘금강석인들 뚫을 수 있으랴’던 그 한을 풀 수는 없었다. 뜰 앞에 서서 상산, 상왕산, 두륜산 너머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엔 언제나 한 사람이 있었다.

“창자는 마디마디 끊기는 것 같고, 눈물은 강물이 쏟아져 내리는 듯 흐르오. 살아서 혼이 끊어지기보다는 차라리 죽어 한 무덤에 묻히는 게 낫겠소. … 해도 달도 별도 시들지만 내 가슴에 쌓이는 한은 사그라지지 않는구려.’

원교는 아들 영익에게 이 편지를 주고는 아내의 무덤 앞에서 읽고 태우라 하였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