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유전무죄’ 32년

道雨 2020. 8. 12. 10:39

‘유전무죄’ 32년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된다.”

탈주범 지강헌이 ‘무전유죄’와 짝을 지어 참담한 사법 현실을 풍자한 표현 ‘유전무죄’의 장본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었다. 전경환은 76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7년(3년 정도 복역 뒤 출소)을 선고받았는데, 지강헌은 556만원을 훔친 죄로 징역 7년에 추가로 보호감호 10년 처분을 받았다. 도무지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절규가 나올 법했다.

 

서울올림픽 폐막 직후인 1988년 10월, 형기를 마치고도 보호감호 탓에 풀려나지 못하자, 지강헌은 탈주를 감행해, 일당 3명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가정집에 침입해 인질극을 벌였다. 지강헌은 경찰에 텔레비전 생중계를 요구해 관철한 뒤, 어린 시절 ‘시인’을 꿈꿨다는 따위의 인생사를 풀어놓았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은 그 과정에서 나왔다.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

 

지강헌 일당의 탈주, 인질 사건 뒤 우리의 사법 현실은 얼마나 변했을까?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가, 지난 10일 2심에선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이상훈 전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사례가 또다시 ‘유전무죄’ 풍자를 떠올리게 한다. 2심 재판부는 1심과 다른 판결을 내린 이유로, 증거 관련 문건의 입수가 위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들었는데, 상황이 애매하고 좀 복잡하다. 삼성 재벌이 아니었더라도 ‘실제론 유죄인데, 판결은 무죄’인 묘한 상황이 됐을지 모르겠다.

검찰이 관련 문건을 확보한 것은 2018년 2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다스 관련 소송비 대납 의혹을 수사할 때였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진행하던 중 인사팀 직원의 증거 인멸 정황을 포착해, 그의 차량에서 이 전 의장 공모를 입증해줄 자료를 포함한 하드디스크를 발견했다. 다스 사건을 수사하다가 노조 와해 관련 자료를 우연히 덤으로 확보한 것인데, 문건 발견 장소인 차량이 1차 압수수색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아 위법이라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금속노조는 이에 성명을 내어 “우연히 발견한 자료로 수사했으니 무죄라는 재판부의 논리는, 평생 재벌에 맞서 싸울 각오를 한 내부 고발자가 나오기 전에는 자본의 노조 파괴 범죄를 수사하고 처벌할 길을 영원히 봉쇄하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결과에 따라선 또 다른 유전무죄 논란을 일으킬 대형 사건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불법승계 사건 기소 여부이다. 지난 6월26일 검찰수사심의위원회 뒤 한 달 반을 넘긴 지금껏 검찰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법률소비자연맹이 올해 6월 대학생과 대학원생 753명을 대상으로 ‘법 의식’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85.3%(642명)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14.1%(106명)에 불과했다. 이런 비율은 연례적으로 이뤄진 이전 조사에서도 거의 같았다.

설문조사 통계치를 떠나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현재진행형의 생명력을 띠고 끊임없이 반복 재사용되고 있는 자체가, 사법 불신의 갑갑한 현실을 대변한다. 갈 길이 멀다.​

 

김영배 논설위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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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57358.html#csidx4257b3485b087008b2148d62e955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