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감염병 시대의 민주주의

道雨 2020. 10. 20. 10:24

감염병 시대의 민주주의

 

* 주말이었던 지난 17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 ‘도심 내 집회 금지'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광화문광장엔 3주 만에 대규모 집회도, 경찰 차벽도 등장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지난주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주 만에 경찰 차벽이 사라진 건 눈길을 끈다. 코로나 방역단계(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에서 1단계로 내려온 탓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론 차벽 설치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려를 경찰과 정부가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코로나 상황이 다시 악화되고 광복절 때처럼 극우 보수단체의 대규모 불법시위 정황이 나타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감염병 시대에 기본권 제약을 최소화하면서 집회·시위를 열 수 있는 ‘조화와 균형’에 한 발짝 더 다가서려면, 차벽은 다시 등장하지 않는 게 좋다.

 

차벽이나 삼엄한 검문검색 없이도 지난 토요일 서울 도심의 보수단체 집회가 순조롭게 끝난 건 의미가 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집회 장소인 인도와 차도에 경찰병력이 배치됐지만, 시민과 차량 통행은 자유로웠다고 한다. 100명으로 제한된 집회엔 90여명이 참석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의자에 앉았고, 집회 뒤편에선 경찰과 구청, 주최 쪽이 함께 참석자들의 발열 검사를 진행했다.

인원과 장소의 제약은 있지만, 이렇게라도 확성기를 통해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건 중요하다. 대규모 감염 확산이란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광복절과 뒤이은 개천절·한글날 집회를 거치며, 시위단체와 경찰 모두 절제된 형식의 집회·시위에 조금씩 의견 접근을 이뤄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사랑제일교회처럼 집회를 정치적 갈등을 키우는 장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하지만 국민 공감을 얻긴 힘들다. 정부를 공격하기 전에 국민 건강부터 심각하게 공격할 위험성이 큰 탓이다. 차벽이나 검문소 설치 등 경찰의 지나친 대응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를 보면 정부가 과도하게 공권력을 행사했다고 여기는 국민은 많지 않다.

이것이 경찰력과 행정권의 남용을 합리화하는 발판이 되어선 곤란하다. 정부는 “초유의 사회적 재난 속에서 일정 부분 기본권 제약은 불가피하지만, 이를 통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한 방역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말한다. 10월12일 기준으로 인구 10만명당 한국의 코로나 사망률은 0.8명으로, 미국(64.9명), 영국(64.8명), 프랑스(50.3명), 일본(1.3명)에 비해 훨씬 낮다. 전세계가 벤치마킹하는 케이(K) 방역의 힘이다.

 

케이 방역 성공의 핵심 요인은 우리 국민의 높은 공동체 의식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확진자 동선 파악을 위한 스마트폰 추적과 위치정보 공유, 빅데이터 활용 등의 법적 논란이 채 불거지기도 전에, 공공 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조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건 바로 시민들이다.

감염병예방법 제49조에 대중교통에서 마스크 쓰기를 의무화했지만, 이 조항을 굳이 기억하지 않더라도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쓰는 걸 모두가 ‘시민의 책임’으로 여기고 있다.

 

정부가 ‘사회적 재난 상황에서의 기본권 제약’ 문제를 좀 더 무겁게 인식하고, 집회·시위나 개인 프라이버시 문제에 훨씬 세심하게 접근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과 규정에 기대서 감염병 재난에 대처하는 것보다, 국민의 자발성과 믿음에 기반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고 중요함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경찰력과 행정권을 항상 국민 지지를 바탕으로 행사하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지난해 말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가 처음 발병했을 때만 해도 1년 가까이 세계적 유행이 지속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년 상반기 중 치료제가 나오리라 많은 이들이 기대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코로나가 지나가더라도 제2, 제3의 또다른 팬데믹이 닥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시적이 아닌, 일상적인 감염병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일시적인 기본권 제약’의 수준에 주목할 게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민주주의 원칙과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주말의 도심 집회처럼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새롭게 규정과 합의를 이뤄내서 실천해 나가는 게 긴요하다.

광장을 에워싼 경찰 차벽이 볼썽사납다면, 통행을 완전히 막지 않으면서 방역에 도전하는 불법행위를 막을 수 있는 강화플라스틱 차단망 같은 장비를 새로 만들어 대응해야 한다. 스마트폰을 통한 위치정보 수집이 앞으로 정부, 특히 기업의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되지 않으리라는 걸 국민에게 분명하게 납득시키고, 이를 위한 법적·제도적 정비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다. 집회와 시위를 정치적 공격 수단 정도로만 여겨선, 저 멀리 앞서 있는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따라갈 수 없다. 이런 논의와 논쟁이 감염병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켜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박찬수 ㅣ 선임논설위원

pcs@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6357.html?_fr=mt0#csidxa799976907a818e81179969cf086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