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국보 1호 남대문·2호 원각사탑…100년전 일본 학자가 정했다

道雨 2021. 3. 11. 09:34

국보 1호 남대문·2호 원각사탑…100년전 일본 학자가 정했다

1909~1910년 일본 학자 ‘조선의 예술’
정인성 영남대 교수가 발굴·번역

문화유산 547종 갑을병정 분류
일본 관련·예술성 있으면 ‘갑을’, 첫머리에 남대문·원각사탑 등장

보존가치 없다 판단 ‘병정’ 낙인, 관아·고찰 다수 헐리는 빌미

 

 

1909년 세키노와 야쓰이가 조선의 고적들에 대한 최초의 조사분류 작업을 벌일 당시 가장 먼저 주목했던 문화재인 서울 숭례문. 조사 당시 야쓰이가 찍은 유리건판 사진이다. 세키노는 조선시대 최고의 건축물로 숭례문을 지목하고 분류표에서 가장 앞머리에 ‘갑’으로 분류해 올리면서 ‘남대문 국보 1호’의 관행을 처음 만들었다.

서울 남대문(숭례문)과 원각사터 십층석탑은 59년째 대한민국 국보 1호와 2호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고 지정번호가 달린 국보·보물 제도가 시행된 이래 ‘국보 1호 남대문, 국보 2호 원각사탑…’으로 시작하는 지정번호 서술 방식은 국보의 권위를 나타내는 공식처럼 자리 잡았다.

 

왜 숭례문과 원각사탑을 각각 국보 1·2호로 정한 것일까. 문화재청은 “관리를 위한 편의적 차원의 번호일 뿐”이라고 설명하지만 설왕설래는 끊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조선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내리면서 이듬해 관보에 169건의 보물, 고적, 천연기념물 등 1차 지정문화유산을 발표한다. 당시 보물 1·2·3·4호(당시 국보는 일본 현지 문화재만 지정했다)에 남대문과 동대문, 보신각종, 원각사탑이 나란히 지정됐다. 이때도 1호는 남대문이었다. 동대문과 더불어 옛 서울 도성의 관문이라는 점, 임진왜란 당시 왜장이 서울에 입성했던 문이란 점 등을 고려했고, 이런 지정 관행이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는 학계의 추정이 나왔다.

1909년 조사 당시 야쓰이가 찍은 서울 종로 원각사터 석탑. 세키노는 15세기의 이 탑이 의장이 풍부하고 수법이 정려해 조선에서 걸출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비견할 만한 탑이 거의 드물다고 극찬했다. 실제로 그는 ‘갑’ 분류 목록 첫머리의 남대문 다음에 이 탑을 나열해, 후대 ‘국보 1호 남대문, 국보 2호는 원각사탑…’으로 이어지는 지정번호 관행을 처음 제시했다.

이런 추정은 역사적 진실에 얼마나 가까울까? 최근 그 시원이 경술국치 전 일본 학자의 고적 조사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때 문화재 가치를 네 단계로 분류한 주관적 판단이 훗날 국보·보물 지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역사적 단서가 나왔다. 1909~1910년 한반도 문화유산 500여점의 현황을 공식 조사한 뒤 최초로 분류 목록을 만든 일본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와 보조 연구자로 작업을 도왔던 야쓰이 세이이쓰의 보고서인 <조선 예술의 연구> 본편(1909)과 속편(1910)이 최근 발굴돼 번역본이 공개된 것이다.추적 작업을 벌인 이는 정인성 영남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다. 그는 일본에서 수년 전 입수한 <조선 예술의 연구> 보고서 두편과 야쓰이의 개인 자료를 완역하고 분석을 곁들인 자료집을 10일 공개했다.<한국 고고학자가 다시 쓰는 ‘조선고적조사보고’>란 제목이 붙은 자료집은 경상북도와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의 지원으로 나왔다. <조선예술…>의 일부인 ‘조선건축조사 약보고’(세키노 집필)를 보면, 세키노와 야쓰이는 당시 조선의 문화유산 547종을 대상으로 촬영과 분석, 굴착 등을 포함한 답사 조사를 벌인 뒤 ‘갑·을·병·정’으로 분류했다. 일본 역사와 연관성이 있고 예술성이나 역사적 가치가 가장 우수한 것을 갑, 그 뒤를 잇는 것을 을로 묶었다. 병·정은 보호의 필요성이 없거나 전용할 수 있는 것들로 분류했다. 갑 등급 첫머리에 남대문과 원각사 십층석탑이 등장한다. 이어 창덕궁 돈화문, 문묘 대성전, 경주 분황사탑, 첨성대, 불국사 다보탑, 석굴암, 태종무열왕릉 비석 등이, 을 등급에는 동대문과 수원성곽, 명륜당 등이 거명된다.

1910년 10월10일 세키노가 ‘각서’란 제목으로 제출한 조선 건축문화재 보존방안 의견서. 고적보존법을 실시해 조선의 문화유산들을 특별보호건조물, 국보 등으로 지정해 보호할 것과 개성 남대문을 점유하고 개설된 헌병 분견소를 이전할 것, 만월대 유적을 보호할 것, 경주의 석굴암, 분황사 9층탑,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등을 수선해야 한다는 건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게 등급을 가른 것은 이 땅에서 최초로 관과 학계에 의해 시행된 근대 문화재 분류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정 교수는 “특히 남대문과 원각사탑이 1909년 분류 기록에도 갑의 첫머리에 올라와 있는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고 짚었다. 경성에 들어온 조사단이 역을 나와 바로 맞닥뜨린 첫 고적이 바로 숭례문이었고, 조사단장 세키노가 경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각별한 관심을 표명한 것이 국보 1호로 자리를 굳히게 된 근거가 됐다는 것이다. 원각사터 석탑도 세키노는 “15세기의 이 탑이 의장이 풍부하고 수법이 정려해 조선에서 걸출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비견할 만한 탑이 거의 드물다”고 극찬했다. 이런 판단이 결국 후대 ‘국보 1호 남대문, 국보 2호 원각사탑…’으로 이어지는 지정번호 관행을 낳았다는 설명이다. 정 교수는 “1909년~1910년 당시 고적 조사는 일제 당국이 행정이나 통치 거점으로 재활용할 수 있는 조선의 건축 유산을 찾으려는 목적이 컸다”면서 “갑·을로 보고된 문화재는 당국의 관리를 받을 수 있었지만, 병·정은 시설물로 전용하거나 철거 대상이 됐기 때문에 멸실·훼손되는 수난을 겪었다”고 짚었다. 실제로 해인사, 통도사 등 고찰의 주요 전각은 당시 병·정으로 지목돼 상당수가 헐리거나 훼손됐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도판 정인성 교수 제공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86291.html?_fr=mt1#csidx20a532fbb06578eb3782726fd8d32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