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처, 기각될 구속영장 왜 청구했나
우리나라는 형사 사법에 있어서 정치(민주주의)와 법치(법치주의)의 분리를 중시하여, 내각의 일원인 법무부 장관과는 별도로 임기가 보장되는 검찰총장을 두었다.
소위 ‘고발 사주’ 의혹은 정권이 검찰권 행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혹이 아니라, 거꾸로 검찰이 정치적 지형을 바꾸려고 했다는 의혹이다. 정치가 법치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안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분리 제도의 허를 찌른다. 이것은 후진적 현상으로 우리나라처럼 민주주의가 성숙한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공직 비리 척결과 검찰권 견제라는 두가지 목적을 위해 설립되었으니, 고발 사주 의혹을 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관이다. 그런데 공수처가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하여 청구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
법원에서 보면 기이한 청구였을 것이다. 48시간의 구금도 안 된다고 체포영장을 기각했는데, 10일 동안 구속하겠다고 영장을 바로 다시 청구한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사례이고, 발부해주고 싶어도 발부할 명분이 없다. 법조 경력 20년이 넘는 처장, 차장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는 사건에서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이 영장은 기각되라고 청구한 것이다. 문제는 왜 청구했느냐이다.
공수처는 고발 사주 의혹을 수사할 의지가 없다. 수사에 착수하였는데, 막상 사건은 어렵고, 수사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질 사명감과 소신이 없다. 그런데 의혹 자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내용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기관으로 이첩할 명분이 없다. 그동안 명분 없는 이첩, 자의적 이첩으로 비판받고 있었는데, 이 사건마저 이첩하면 공수처 폐지론이 확산될 것이다.
공수처는 수사 지연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자연스럽게 합리화해주는 영장 기각을 택한 것이다. 공수처가 의욕적으로 청구했는데 법원이 기각했으니,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판사들의 소극성을 비판할 것이다.
공수처의 무능에 대한 지적은 공수처의 인원과 조직이 과소하기 때문이라고 하면, 오히려 공수처 규모를 확대하는 반전의 카드가 될 것이다. 수사가 아니라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수처는 필자를 포함한 국민의 염원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공수처 운영을 보면 우리가 소망했던 그 공수처가 아니다.
공수처장의 서울중앙지검장 황제 조사 소동, 법적 근거 없이 스스로 권한 확대를 추구한 기소권 유보부 이첩, 많은 중요 사건들에 대한 방치와 자의적 이첩, 정치적 고려에 의한 1호 사건 선정(조희연 교육감 사건), 인사의 독립을 스스로 훼손하고자 했던 검사 후보 정원 2배수 추천 논란, 소위 우병우 사단 변호사의 부장검사 임명 추천 등, 공수처는 출범한 지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온갖 부적절한 행태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러한 소동의 공통점은 무능, 공명심, 권력 지향이다. 적어도 부적절한 정치적 행태를 보인 서울중앙지검장 비밀조사에 대해서만큼은 공수처장의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공수처 설립을 추진했던 현 정부와 진보 진영은 공수처에 대하여 너무나 관대했다. 이러한 관대함이 공수처가 그 설립 취지에 충실하기보다는 앞으로의 정치적 진로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사건을 고르고, 입맛대로 처리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검찰의 독립을 격려했다가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수사로 귀결되었던 그 과정의 데자뷔이다.
이윤제ㅣ명지대 법대 교수·전 국제민간항공기구대표부 대사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017509.html#csidx406ef149433e7b2a9d92eb09282f6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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