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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번호 7549, ‘공간 7549’, 1975년 4월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道雨 2021. 11. 10. 09:18

전화번호 7549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을 지나치게 많이 인상하는 바람에 일자리가 줄었다거나 나라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사람은 그 최저임금 인상률 결정이 청와대 정책실 주도로 이뤄진 것이었으므로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듯 말하고,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던 사람은 최저임금 인상률 결정에 자신도 깜짝 놀랐다면서, 최저임금위원회가 국민 공감대를 구했어야 했는데 그러한 과정이 생략됐다고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그 깜짝 놀랄 만한 2018년 최저임금 인상률이 16.4%였다. 그 이듬해인 2019년 인상률은 10.9%였고, 2020년 2.87%, 올해 1.5%, 내년 5.05%이다. 소득주도성장을 내걸었던 문재인 정부 5년간 최저임금 평균 인상률은 7.3%에 그쳤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박근혜 정부 평균 최저임금 인상률 7.4%보다 낮은 수치이다.

 

2015년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했던 최저임금 인상률은 무려 39%였고, 지난 4월 조 바이든 대통령은 내년 3월 말부터 최저임금을 37% 인상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자본주의 원흉’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 미국 사회에서 흔히 ‘리버럴’(liberal)이라고 표현되는 ‘자유주의’를 기치로 삼는 민주당 정부도 그만큼은 한다.

 

미국 민주당이 노동조합을 대하는 태도는 미국 노동절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2015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내 가족의 생계를 보장할 좋은 직업을 원하십니까? 누군가 내 뒤를 든든하게 봐주기를 바라십니까? 나라면 노조에 가입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한동안 화제가 됐다.

올해 노동절에 바이든 대통령은 “월 스트리트가 이 나라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중산층이 만들었고 그 중산층은 노동조합이 만들었습니다”라고 했다.

만일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이 그렇게 말했다가는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정치적 생명이 거의 끝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이 ‘좋은 나라’라는 뜻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에 대한 인식은 다른 나라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형성돼 있다는 뜻이다.

 

최저임금 인상이 오히려 고용을 늘린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데이비드 카드 교수가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한국의 주류 경제학자들과 언론은 연구 결과가 아니라 연구 방식에 대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라거나 다른 학자들의 후속 반론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는 등, 그 의미를 애써 축소하기에 바빴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 경제 선진국 대한민국이, 어째서 이토록 사회 전체가 오른쪽에 치우쳐 있는 ‘보수 과잉’의 사회가 되고 말았을까?

중세 농경사회로부터 근대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 100여년의 역사가 우리나라에선 줄잡아 식민지 40년 뒤에 분단 70년 세월로 이어졌고, 그 와중에 군사정부가 30년 가까이 집권을 했다.

그 왜곡된 역사 발전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근대 산업사회, 곧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필요한 사회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거의 ‘원초적 불능’에 가까웠다.

 

이북에서 집권하고 있는 정당의 명칭이 ‘노(로)동당’이고, 발행하는 신문도 ‘노(로)동신문’이어서, ‘노동’을 존중하는 일체의 진보적 발언은 모두 ‘빨갱이’로 규탄당했다. 부패한 정치 권력은 모든 양심 세력과 비판 세력에게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손쉽게 제거할 수 있었고,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학살당한 사람들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다.

 

대구 지역 청년들로부터 강연 초청을 받으며, 그 행사 장소가 ‘공간 7549’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숫자가 설마 1975년 4월9일을 의미하랴 싶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걸어가다 보니 가까운 곳에 ‘대구근대역사관’도 보이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역시 그랬다. 1975년 4월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불과 몇시간 뒤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8명의 귀한 목숨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내 나이 스무살에 발생했던, 인생의 분기점이 된 사건…. 서울 종로5가 기독교방송 2층 강당에서 열렸던 시국 기도회에서 사복 형사들에게 끌려 나가던 유가족의 모습과 그들이 외쳤던 쇳소리 같은 비명이, 46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살아남은 모든 활동가들은 그 부채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죽어서 그 사람들을 만나면 “당신들이 죽은 뒤에 그래도 열심히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다짐이, 1970∼80년대를 버티게 한 무기였다. 내 전화번호의 끝자리가 7549이다.

 

하종강ㅣ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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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18624.html?_fr=mt0#csidxe789d54553f4162af93af97d3afe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