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적대’는 어떻게 ‘악수’를 거쳐 ‘포옹’으로 진화했나

道雨 2022. 3. 8. 09:40

‘적대’는 어떻게 ‘악수’를 거쳐 ‘포옹’으로 진화했나

 

이제훈의 1991~2021 _23
 
2000년 6월14일 저녁 7시,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끝났다. 이어 목란각에서 2시간30분 남짓 진행된 ‘답례만찬’에서 김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비로소 민족의 밝은 미래가 보입니다. 이제 지난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이 흘린 눈물을 거둘 때가 왔습니다.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감싸주어야 할 때입니다.”
 
* “여러분, 모두 축하해주십시오. 우리 두 사람이 남북공동선언에 완전히 합의했습니다.” 2000년 6월14일 밤 10시께 평양 목란각,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을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분단 이후 첫 정상 합의 선언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저는 오늘부터 2박3일 동안 평양을 방문합니다. 이번 평양 길이 평화와 화해의 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고 남북 7천만 모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냉전종식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2000년 6월13일 오전 김대중 대통령이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러 평양에 가기 전 성남 서울공항에서 읽은 ‘출발 성명’의 한 구절이다.
 
 

“10초 뒤 38도선을 넘습니다. 3시 방향에 우리 영토인 백령도가 보이고 2시 방향에 북쪽 땅인 장산곶이 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태운 ‘대한민국 공군1호기’(대통령 전용기)는 기장의 안내방송과 함께 오전 9시54분께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10시29분 평양 순안공항에 안착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1948년 두 ‘분단정부’ 수립 이래 첫 서해 직항로 운항이다.
 
만감이 교차해서일까. 전용기 트랩에 모습을 드러낸 김 대통령은 멀리 순안공항 너머 산하를 한참 바라봤다. 트랩 아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악수를 했다. ‘3년 전쟁’을 치른 남과 북의 최고지도자가 처음 만나 한 악수다. 두 정상은 조선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분열을 받았다. 1950년 6월25일~1953년 7월27일 대한민국 국민의 목숨을 숱하게 앗아간 인민군의 총과 칼이 대한민국 대통령한테 최고의 예우를 바친 것이다.
김 대통령은 ‘평양 도착 성명’에서 “우리는 한 민족, 운명공동체”라며 “반세기 동안 쌓인 한”을 풀고 “굳게 손잡자”고 호소했다.
20분간의 공항 환영행사를 마친 두 정상은 승용차에 함께 타고 평양시내를 카퍼레이드했다. 순안공항에서 김 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까지 가는 길가엔 50만을 헤아리는 군중이 꽃술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 모든 장면은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에스비에스>(SBS), <와이티엔>(YTN) 등 4개 방송사가 생중계했다. 분단사 첫 평양 생중계 방송이다.
평양에 간 공동취재단 50명을 뺀 국내외 언론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2층 프레스센터에서 평양 소식을 전했다. 롯데호텔이 ‘세계 뉴스의 창’이 된 셈인데, 때맞춰 롯데호텔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다. ‘강제해산’ 여부를 묻는 경찰에 ‘김대중 정부 청와대’는 “그냥 두라”고 답했다고, 당시 청와대 대변인 박준영은 회고록 <평화의 길>에 적었다.
그렇게 롯데호텔은 파업 노동자와 기자와 투숙객이 한데 엉켜 붐볐다. ‘국민의 정부’를 자임한 김대중 정부가, 이전의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부정부’와 다름을 드러낸 ‘민주적 소음’이다.
 
백화원 영빈관 1호각에서 김 대통령과 마주 앉은 김 위원장이 이런 말을 했다.
“대통령께서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평양에 오셨습니다. 전방에서는 군인들이 총부리를 맞대고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나갈 판인데, 대통령께서는 인민군 명예의장대의 사열까지 받으셨습니다. 이건 보통 모순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상회담은 그래서 필요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침내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회담이 6월14일 오후 3시 백화원 영빈관 회의실에서 시작됐다. 회담 들머리에 분위기를 눅일 대화가 오갔다.
“김 위원장께서 공항에 나와 영접해주시고”라며 김 대통령이 인사를 하자, 김 위원장이 이렇게 받았다. “구라파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은둔생활을 한다고 하고… 이번에 김 대통령이 오셔서 제가 은둔에서 해방됐다는 거예요.”
국내외 거의 모든 언론이 “은둔에서 해방”이라는 김 위원장의 자기 묘사에 꽂혀, 이를 제목으로 삼은 기사를 긴급 타전했다.
 
김 대통령은 준비해 간 회담 의제를 30분에 걸쳐 설명했다. ①화해와 통일 ②긴장완화와 평화 ③남북 교류협력 ④이산가족 ⑤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 정식 초청 문제가 그것이다.
김 위원장은 “대통령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무엇을 구상하시는지 더욱 잘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인사치레를 했다. 그러고는 1994년 7월 무산된 남북정상회담과 김일성 주석의 죽음으로 화제를 옮겼다.
“김일성 주석님께서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남북 간의 실질적 경협사업을 시작하자고 제의할 계획이었습니다. 우선 경의선 현대화 사업부터 추진하고자 하셨지요. 주석님께서는 돌아가시던 바로 당일에도 묘향산으로 경제성원들을 불러 북남경협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협의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듣고 필요한 자료들을 검토하셨습니다.”
 
‘남북경협’은 ‘1994년 김일성’뿐만 아니라 ‘2000년 김정일’한테도 최우선 관심사였다. 김 대통령에 앞서 김 위원장을 만난 회담 배석자 임동원은 ‘남북 교류협력’ 문제가 “북측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의제라고, 회고록 <피스 메이커>에 적었다.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의제별로 서로의 의견과 구상을 확인하며 공통 기반을 넓혀갔다. 그러곤 “뭔가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우리 두 정상이 직접 의사소통”하자며, 사상 첫 ‘핫라인’(정상 직통연락선) 개설에 합의했다.
이를 두고 임동원은 “두 정상 사이의 비상연락망은 ‘국민의 정부’ 마지막 날까지 계속 유지되며, 남북문제 해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며 “‘핫라인’의 개설이야말로 정상회담 최대의 성과 중 하나”라고 짚었다.
 
2000년 6월14일 저녁 7시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끝났다. 두 정상의 치열한 밀당과 결단의 결과를 담은 ‘6·15남북공동선언’ 문안 작업은, 두 정상의 대리인 구실을 한 임동원과 김용순이 맡았다.
이어 목란각에서 2시간30분 남짓 진행된 ‘답례만찬’에서 김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과 저는 정상회담을 성공리에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민족의 밝은 미래가 보입니다. 이제 지난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이 흘린 눈물을 거둘 때가 왔습니다.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감싸주어야 할 때입니다.”
좌중이 숙연해졌다.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 속에 진행되던 만찬 중에도 임동원-김용순 짝은 ‘6·15공동선언’ 문안을 다듬었고, 결국 두 정상이 모두 승인했다. 시침이 밤 10시를 향해 가던 때 김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함께 연단으로 걸어나와 감격스레 외쳤다.
“여러분, 모두 축하해주십시오. 우리 두 사람이 남북공동선언에 완전히 합의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런데 ‘3년의 동족상잔’과 장기 분단·적대의 상처를 위무할 감격스러운 역사적 순간을 남과 북 7천만 시민·인민에게 전할 취재진이 만찬장 안에 없었다.
박준영 청와대 대변인이 김 대통령한테 ‘재연 연기’를 요청했고, 김 대통령의 눈길을 받은 김 위원장은 “좋은 날인데 배우 한번 하십시다”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내외 언론에 실린, 두 정상이 6·15공동선언에 최종 합의했다며 손을 맞잡아 들어올린 사진은, 이런 사연이 있는 ‘연출 사진’이다. 2000년 6월14일 밤 11시40분 백화원 영빈관에서 ‘6·15남북공동선언’ 조인식이 진행됐다.
 
6월15일 낮 12시부터 3시까지 백화원 영빈관에서 ‘6·15남북공동선언 경축 및 송별연회’가 김 위원장 주최로 열렸다. 김 위원장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남쪽에서 비료를 보내주어 감사합니다. 인민들이 매우 고마워하고 있어요. 비료 10만톤이면 알곡 30만톤의 생산효과를 가져옵니다. 3배의 생산효과가 있는 겁니다.” 비료와 식량 지원에 고맙다는 인사다.
그러곤 김 위원장은 “어제 만찬 때 대통령께서 6월을 ‘전쟁을 기억하는 비극의 달’에서 ‘화해와 평화를 기약하는 희망의 달’로 바꿔나가자고 말씀하실 때, 저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라며 “인민군 총사령관으로서 오늘 12시부로 전방에서 대남 비방방송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습니다”라고 발표했다. 오랜 세월 군사분계선 일대의 뭇생명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남과 북의 상호 비방방송 소음은 그렇게 멎었다.(북은 2000년 6월15일 정오, 남은 6월16일 0시부터)
 
김 대통령은 평양에 머문 54시간 가운데 11시간을 김 위원장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6월15일 두 정상은 평양 순안공항에서 헤어지기 전 세 차례 서로 껴안았다. 남과 북의 두 정상 사이에 마음의 길이 열리며, 첫 만남의 ‘악수’가 이틀 만에 ‘세 차례 포옹’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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