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우크라이나 전쟁이 만드는 음울한 신세계

道雨 2022. 4. 12. 09:12

우크라이나 전쟁이 만드는 음울한 신세계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패권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으나, 그 균열 역시 드러내고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전례 없는 제재를 러시아에 가했다. 나토 등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은 이 전쟁을 계기로 다시 결속하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취임 이후 표방했던,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싸움 전열의 강화로 이용한다.

 

하지만 미국 주도의 제재 대열에는 빈틈도 커지고 있다. 유엔 안보리의 대러시아 비난 결의안에 중국·인도·방글라데시·파키스탄·남아공 5개국이 반대하고, 35개국이 기권했다. 투표에 불참한 옛 소련 지역의 신생 국가들이나 아프리카 국가들을 고려하면, 미국의 제재 대열에는 적잖은 국가들이 발을 뺀 상태이다. 실제로, 미국의 우방이라는 이스라엘을 포함해 중동 지역 국가들이나, 브라질·멕시코 등도 제재에 불참하거나 소극적이다. 이른바 ‘미들 파워’ 국가들 중 일부가 ‘비미적인’ 행보를 하는 것이다.

 

달러 패권의 위력도 시험받는다. 인도는 러시아의 에너지를 값싸게 수입할 목적으로 루블-루피화 결제 방식으로 러시아산 에너지를 수입하겠다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에 수출하는 석유 대금의 일부를 위안화로 결제받겠다고 밝혔다. 중국이 러시아산 에너지를 계속 수입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폭락했던 러시아 루블화는 최근 전쟁 이전 수준으로 반등했다. 무엇보다도, 유럽 등에 수출하는 러시아 가스 등 에너지를 금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가격이 오른 에너지 수출 대금을 여전히 챙기고 있다. 올해 하반기가 되면, 러시아가 에너지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이 사상 최고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이 발을 빼려고 애를 써왔던 중동 지역에서 ‘비미적인’ 세력 재편도 심상치가 않다. 아랍에미리트(UAE)가 친러시아인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초청해 관계 개선에 나섰다. 미국과 국제핵협정 복원 협상을 벌이던 이란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몸값을 올리며 회담은 공전 상태에 들어갔다. 터키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협상을 중재하며, 영향력을 더 키우고 있다.

 

지정학자 월터 러셀 미드가 정기 기고하는 <월스트리트 저널> 등도 이번 제재가 미들 파워 국가 등에 공포를 심어줬다고 진단한다. 외환보유고를 미국 등 서방 은행에 달러로 예치하고 있는데, 미국의 제재에서 헤징을 할 필요를 심각하게 제기했다는 것이다.

 

전쟁은 장기화의 우려를 낳고 있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의회 청문회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적어도 수년은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첫째, 국제경제가 심각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공급망 혼란, 식량과 에너지 가격 폭등, 인플레이션 고조는 악화할 것이다. 전쟁 이후에도 러시아 에너지 등을 국제경제에서 절연시키려는 미국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둘째,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의 완전한 퇴조와 경제의 블록화이다. 전쟁 이전부터 미국은 중국을 자신이 주도하는 국제경제 체제에서 배제하려 했다. 이제 중국은 전쟁의 후유증을 겪을 러시아를 포함해 유라시아 경제권을 만들려는 데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인도, 이란, 중동 국가들도 미국과 중-러 사이에서 줄타기 행보를 벌일 것이다.

 

핼퍼드 매킨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 서방의 고전적 지정학자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를 차지한 러시아나 중국이 유라시아 환형지대의 이란이나 인도와 연대하는 것을 미국 등 서방 패권의 최대 위협이라고 봤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라시아 연대 세력의 출현을 만드는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이는 냉전시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진영의 대결을 상기시킨다. 아니, 그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냉전 때에는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세력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했고, 서로 절연된 경제 체제를 영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닥칠 수 있는 블록화에서 미국은 과연 중국이나 러시아의 세력권을 인정할 수 있을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의 ‘신자유주의자를 위한 충격 요법’ 기고에서, 9·11테러, 2008년 금융위기, 트럼프의 출현, 코로나19 사태에 이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려 했던 신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바탕이 무너진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를 대체할 질서가 묘연하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질서에서 음울한 디스토피아를 예고한다.

 

 

정의길 |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