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집요한 역사왜곡...단숨에 뒤집은 '파친코' 효과
일제강점기 소재 세계적 화제작
잔혹했던 만행들 전세계에 알려
역사 왜곡 파헤치는 '유효한 역사'
희생자 공감해야 아픈 역사 치유
[한겨레S] 특집
드라마 <파친코> 논쟁을 보며
2006년 미국 더뷰크에 있는 와트버그신학대학원 교수 재임 시절 미국 학생들과 아시아 방문 프로그램으로 중국 난징의 대학살박물관에 들른 적이 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일제 만행의 기록을 보면서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지만, 더 놀랐던 것은 그곳에서 만난 일본 방문객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런 역사를 학교에서 전혀 배운 적이 없다고 했다. 대학살박물관처럼 은닉되고 왜곡된 역사들을 파헤치는 구실을 하는 것을 흔히 ‘유효한 역사’(미셸 푸코)라 한다.
‘문화적 선한 행동=식민지’ 엉터리 주장
지금 한국과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극찬받고 있는 드라마 <파친코>는, 이러한 ‘유효한 역사’를 가장 대중적인 방법으로 구현한 실제 사례에 속한다.
<파친코>의 원작은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이민진 작가의 2017년 베스트셀러 소설이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갖은 역경을 겪으며 재일한국인 가족으로서 4대에 걸쳐 한국-일본-미국을 오가며 ‘사이에 낀’ 삶을 사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과정에서 참혹했던 ‘종군위안부’ 같은 전쟁범죄들과 재일동포 차별 문제 등을 다룬다.
이민진 작가는 위안부 문제와 함께 일본 사회 안에서 ‘사이에 낀’ 채 일종의 변종으로 살아온 재일동포들의 가열찬 삶에서 인종차별을 봤다. 소설이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드라마화되면서, 세계 시민사회에 격한 감동과 함께, 일본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이 같은 반응에 일본 누리꾼과 정부가 보이는 공격성은 거의 이성이 마비된 정도이다. 심지어 한국 내 네오친일파 학자들의 글까지 인용해, 일본이 식민지배를 통해 대한민국의 근대성을 열어주고, ‘문명 선교’(교육·의료 등을 통해 서양 문명의 뿌리인 기독교를 선교함)의 혜택을 줬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 같은 논법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일본이 식민지배를 통해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다는 식의 ‘문명 선교’는, 무사도(무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깊숙이 엮여 있다. 니토베 이나조(1862~1933)가 대표적이다. 그는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했고, 그의 책 <무사도: 일본의 영혼>은 영어로 출간된 매우 영향력 있는 책이다. 그에게 사무라이는 민족의 꽃이며 또한 그 뿌리이다. 아울러 니토베에게 식민주의는 문명 선교를 통한 식민지의 근대적 진보를 의미하며, 문명국이 낙후된 나라에 주는 ‘문화적 선한 행동’이다. 그런데 과연 일본의 파시즘과 제국주의가 근대성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
흔히 식민지는 점령국의 ‘신체 정치학’과 학살의 정책에 엮여 있다. 실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제가 1937년 12월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난징을 점령한 뒤 벌인 난징 대학살에서 6주간 30만여명이 숨졌고, 이들 상당수는 항복한 군인들과 선량한 시민들 그리고 어린아이, 강간당한 부녀자들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되었고, 근대화가 식민지배의 아시아나 아프리카 또는 라틴아메리카로 유포되었다는 주장도 비슷하다. 오늘날 서구 학계에선 이를 해묵은 유럽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환상’이라고 폭로한다. 실제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13세기부터, 즉 상업혁명에서 시작된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예를 들어 제노바나 피렌체 그리고 베네치아를 통해 동아시아와 중동과의 교역이 없었다면, 유럽에는 산업혁명도 자본주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이에 대해 저명한 경제사회학자인 재닛 아부러거드는 유럽의 헤게모니 이전 1250년부터 1350년 사이에 비유럽권의 세계 체제론을 분석했다. 상업적인 세계 체제는 유럽에 앞서 이미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 지배와 중국의 송과 명 시대 그리고 이슬람 지배의 이집트, 더 나아가 이슬람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학문과 문명의 발전이 있었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업의 발전과 유교 안에 담긴 근대적 가치, 동학의 이념과 농민혁명이 대한민국의 근대를 열어가는 원류가 됐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이전이나 이후를 거치면서 국외 독립운동이나 국내의 저항운동,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로 이어졌다. 학문적으로는 포스트콜로니얼(과거의 식민 상황이 독립 이후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의 대안 근대성을 말한다.
이카로스를 닮은 일본
일제강점기와 관련해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논쟁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버드대학에서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시끄럽다. 마크 램자이어는 일본학과 국제법을 연구한 교수다. 그의 논문은 종래의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제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램자이어 교수의 저널 논문이 학문적 가치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들이 쏟아져나오고, 지난해 2월엔 하버드대 교수들의 논문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가 발표됐다. 성명에 참여한 앤드루 고든은 일본 역사와 문화 전문가이며, 카터 에커트는 한국 역사와 동아시아 문명의 전문가이다.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와 하버드의 위안부 논쟁은, 향후 글로벌 시민 정치에 엄청난 파장과 영향을 미칠, 한-일 간 문화전쟁의 시작을 알린다. 버클리 동아시아 콘퍼런스에서 만난 한 일본 정치학자는 한국의 네오파시즘의 입장을 인용한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 이후 한일기본조약(1965) 청구권 협정에서 강제징용이나 심지어 식민지배에 연관된 모든 문제들이 종결된 것이 아닌가? 그러니 대한민국이 더 이상 위안부나 강제징용 또는 식민지 시대의 학살 등을 언급하는 것은 국제법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
무슨 국제법 위반? 오히려 일제가 영토 점령을 한 지역에서 시민들의 권리와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국제법을 어긴 것 아닌가? 국제법 전문가인 칩 피츠에 따르면, 국가 간(inter-national) 법은 세계 시민사회 차원에서 보편적 가치와 인권 그리고 영토 국가의 주권이 상위 개념이 된다. 이른바 ‘국가면제’(state-immunity)라는 관습법은 이보다 높은 수준의 글로벌 인권법 차원에서 유지될 수가 없다.
더 심각한 문화전쟁은 우치다 준 교수의 하버드대 박사 논문 같은 곳에서 드러난다. 한국에선 <제국의 브로커들>이란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 논문은 한국에서 말하는 일제강점기란 근거가 없다는 ‘식민지 근대성 이론’을 일본 정착민의 삶을 통해 주장한 연구서이다. 75만여명의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 정착하며 식민지 땅에 끼친 문화적 영향을 일방적인 논리로 매우 상세하게 다룬다. 아울러 1932년 관동군이 세운 만주국의 일본인 정착민들이 이 지역에 있던 한국인들에게 ‘베푼’ 영향으로 이후 한국의 해외 무역과 산업화, 식민지 근대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우치다 준은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근대화’란 용어가 주권을 박탈당하거나 원주민들이 노예 취급을 당하는 식민지에 사용된다는 것부터가 난센스이다. 만주국을 세운 일제의 실제적 관심은, 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장기 침체에 만주국 착취를 통한 자국 내 경제적 호황을 일으키는 데 있었다. 일제는 국내 산업과 경제 호황을 위해 풍부한 천연자원과 원료들을 착취했다. 만주국 시스템은 전형적인 일제의 중심부-세미 주변부-주변부라는 세계 체제 안에서 작동된 식민지 착취 시스템이었다.
* 학계에서 시도되는 일제강점기 역사 왜곡의 대표적 사례가 존 램자이어 하버드대 교수의 ‘태평양전쟁에서의 성계약’ 논문이다.
아픈 역사 치유에 필요한 것
루스 베네딕트는 문화 인류학 분야에서 고전이 된 <국화와 칼>에서, 일본 문화의 이중성과 파시즘 성격을 예리하게 파헤친 적이 있다. 신격화된 일왕(덴노)과 이를 받치는 군부·정부 형태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방불케 하는 계층 신분과 사회 문화 구성에 엮여 있다.
베네딕트에 따르면, 인종우월성과 배타적 차별은 애초에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유럽 식민주의와 근대성이 만들어낸 인위적 산물이다. 19세기 영국과 미국은 태평양을 지배한 열강이었다. 이들은 일본을 파트너로 환영했지, 헤게모니의 일원으로 본 적이 없었다. 일본의 운명은 그리스 신화에서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다가 녹아서 추락한 이카로스를 닮았다.
우치다 준은 조선 식민지 정착 일본인들을 과거 프랑스령 알제리 정착민 ‘피에 누아르’와 비교하기도 한다. 1848년 프랑스는 북부 알제리를 점령하고, ‘콜롱’이라 하는 지역 행정체제를 수립했다. 기회를 찾아 이 땅을 찾은 이들은 ‘검은 장화를 신은 군인’(피에 누아르)으로 불렸는데, 이들의 후예가 1962년까지 알제리에서 살았다.
프랑스령 알제리 정착 유럽계 백인 ‘피에 누아르’(알제리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80만여명이 알제리 전쟁(1954~1962) 도중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1965년까지 이들은 프랑스 의회에서 자신들의 권리와 삶을 대변해주는 정치 시스템이 없었다. 그 유명한 자크 데리다와 알베르 카뮈가 여기에 속한다. 우치다 준이 말하는 조선 정착 일본인들이 과연 피에 누아르의 유형에 속하는가?
“역사가 우리를 망쳐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파친코>)
망쳐놓은 역사를 치유하는 것은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의 중심이다. 희생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자만이 유효한 역사를 현재에 써나갈 수 있다.
정승훈 시카고신학대학원 석학교수
스위스 바젤대학과 미국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와트버그신학대학원을 거쳐 시카고신학대학원 석학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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