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약탈적 학술지와 스펙 사회

道雨 2022. 5. 10. 09:54

약탈적 학술지와 스펙 사회

 

윤석열 정부 장관 후보자들 자녀의 잇따른 ‘스펙 쌓기’ 의혹으로, 돈만 주면 제대로 된 검증절차 없이 논문을 실어주는, ‘약탈적 학술지’(predatory journal)라는 학술분야 업계 용어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잡지에 학문적 가치가 없는 글을 제출했다면 윤리의 문제고, 입시를 위한 이력 부풀리기를 하려는 의도였다면 공정의 문제다.

 

필자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종종 받는 비슷비슷한 형식의 영문 스팸메일들이 있다.
“우리는 ○○학회다, 당신이 한국의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을 보고 연락드린다, 간단한 절차만 거치면 해외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국제적인 저널에 논문을 게재할 수 있게 해주겠다. 입금은…”
이것이 약탈적 학회라고 불리는 가짜 학술단체들이 하는 일이다. 이들이 한국의 학술지를 모니터링하고 있다는 대목이 흥미로운데, 실제 2018년 명문대 교수들을 비롯한 한국의 많은 연구자들이 이들의 주요 고객이라는 사실이 폭로돼 사회적 충격을 주기도 했다.

 

 
다만 이런 학회와 학술지에 붙은 “약탈적”이라는 수식어는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약탈”당한 대상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가짜 학회들은 돈을 벌었고, 연구자들은 실적을 쌓았다. 이건 공생 관계가 아닌가?
여기에는 구조적인 맥락이 있다. 연구자들의 활동은 지식생산이다. 그 가운데에는 생활비와 책값만 있으면 만들어낼 수 있는 지식도 있고, 현지 조사나 인터뷰, 통계분석 등이 필요한 분야가 있는가 하면, 고가의 실험장비와 재료가 없으면 불가능한 연구도 있다. 어쨌든 돈이 든다.
하지만 학문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재화를 생산하지는 못한다. 실용적이라 여겨지는 공학적 지식들도 산업에 적용돼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연구자들을 후원하는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는 누구에게 투자하는 게 효과적인지 판단할 지표가 필요하다. 전문가 집단의 평가를 생각해볼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 수치화하기 어렵다. 결국 출판 실적이나 인용 빈도 같은 양적 평가가 남는다.
 
양적 평가 제도로 인한 실적 압박은 상당하다. 질적으로 뛰어난 연구를 하는 연구자가 양적으로도 풍부한 성과를 내는 경우가 많지만, 그 정도는 분야마다 천차만별이다. 대부분 단독 저술이고 장기간 언어, 문헌연구가 필요한 인문학 분야에서 매년 열편 가까운 논문을 발표하는 연구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 성실성에 감탄하기보다는 그 질적 수준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학위 취득, 취업, 연구비 지원, 고용유지 등이 걸린 평가와 경쟁 앞에서 연구자들은 실적 부풀리기의 유혹을 느끼기 쉽다. 약탈적 학술지의 먹잇감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표절이나 오류투성이 논문이라도, 학문적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는 ‘리포트 수준’의 글이라도, 수년간 노력과 사유가 응축된 중요한 논문과 마찬가지로 연구업적 한편으로 집계되기 때문이다.
 
안전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학술지 평가 제도를 통과한 등재지에 실린 논문만을 연구실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 평가도 양적 지표들 위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학술단체들은 행정절차를 통과하기 위한 논문 수를 맞추고 증빙서류들을 꾸미는 데 역량을 낭비하게 된다.
 
해외 학술지는 이런 식의 품질관리조차 불가능해, 주로 북미권에서 만들어진 주요 학술인용색인들이 그 역할을 대체한다. 그러나 이는 검색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한국의 등재지 제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그 목록에 올라 있으면 표절, 대필, 가짜 논문도 업적이 되고, 목록에 없는 학술지에 실리면 아무리 훌륭해도 연구실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결국 이미 널리 알려진 약탈적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것은 하수다. 학술지 평가 제도의 맹점을 이용해 등재지 지위를 유지하며 부실 논문을 대량으로 실어주는 국내외 학술지들을 공략하는 편이 훨씬 ‘그럴듯한’ 이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자녀가 받은 입시컨설팅이 그렇게까지 고급은 아닌 모양이라는 연구자들의 비아냥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다만 이 비아냥에는 수치심이 섞여 있다. 대학이 기업채용 방식으로 스펙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왜곡된 업적평가 시스템 때문에 비교적 쉽게 꾸밀 수 있는 논문 실적은 입시 컨설턴트들의 좋은 장사수단이 됐다.
학계는 그들에게 조롱당했다. 그리고 지금 이 체제라면 조롱받아도 할 말이 없다.
 
 
한승훈 | 종교학자·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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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학술지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고등학생 자녀의 대입용 ‘스펙 쌓기’ 논란이 한 후보자 인사청문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한 후보자의 큰딸은 특히 자신이 참여한 논문 형식의 저작물을 국외 학술지에 나눠 실었는데, 이 학술지들은 돈만 지불하면 논문을 게재해주는, 이른바 ‘약탈적 학술지’로 분류된 곳들이다. 그의 저작물이 게재된 3곳의 홈페이지를 보면, 논문 투고 비용으로 30~160달러를 청구하고 있다.

 

‘약탈적 학술지’라는 용어는 2010년 미국 콜로라도대학의 도서관학자인 제프리 빌이 최소한의 내부 검증 과정이나 동료 심사 없이 논문의 게재를 보장하는 일부 출판사와 저널들의 목록을 공개하면서 공론화됐다.

‘약탈적 학술지’는 학술 지식의 공공성을 강화하자는 ‘오픈 액세스’ 운동의 변칙적 부산물이다. 학술 지식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표방하는 오픈 액세스가 활성화되면서 ‘학술지’를 표방한 웹사이트가 크게 늘었고, 이 가운데 논문 투고료에 따른 수익에만 집중하는 행태를 보이는 곳들이 생겨났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건전학술지원시스템에선 △동료 심사가 없거나 형식적 △공격적 마케팅 △편집부·심사자의 불투명한 정보 등을 주요 특징으로 꼽고 있다.

 

애초엔 논문 게재 경험이 많지 않은 초보 연구자들이 이들 학술지의 먹잇감이 되는 경우가 많아 ‘약탈적’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동시에 이를 알면서도 ‘경력 부풀리기’를 위해 활용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점도 학계의 골칫거리다.

한 후보자 쪽은 “학교 리서치 과제, 고교 대상 에세이 대회를 통해 작성한 것을 한꺼번에 ‘오픈 액세스 저널’이 요구하는 형식에 맞게 각주, 폰트를 정리하여 업로드한 것”이라며 “해당 ‘오픈 액세스 저널’은 간단한 투고 절차만 거치면 바로 기고가 완료된다”고 밝혔다.

오픈 액세스 학술지가 고등학생의 학교 과제를 올려놓는 공간 자체가 아닐뿐더러, 여전히 동료와 편집위원들의 까다로운 심사로 양질의 논문을 유지하려 애쓰는 이들을 모독하는 발언이다.

한 후보자는 9일 청문회에서 “실제로 입시에 사용된 사실이 전혀 없고 입시에 사용될 계획도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굳이 ‘약탈적 학술지’에 투고료를 내면서 논문 형식을 차용해 글을 실은 이유는 뭘까.

 

최혜정 논설위원 id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