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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직권재심 재판부, 수형인 30명 전원 무죄. 국가 공권력 부당·위법 행위 바로 잡아야

道雨 2022. 8. 31. 11:57

“4·3 희생자 아버지 모습 묻자 ‘거울보라. 너영 똑같이 생겼져’”

 

 

 

 

제주4·3 직권재심 재판부, 수형인 30명 전원 무죄
청각장애인 어머니 두고 끌려간 아들 사연 눈물
검찰 “국가 공권력 부당·위법 행위 바로 잡아야”

 

 

                          *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지석. 허호준 기자

 

 

“청각장애인이었던 어머니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그 사건이 터졌습니다. 어머니가 수화로 제게 말해줬습니다. 오빠 두 분이 밭에서 녹두를 따는데 큰 오빠를 심어(잡아)갔다고.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나이 들어 치매가 왔습니다. 치매에 걸리면 현재 일은 잊어버리고 과거 일만 기억한다고 하잖아요. 어머니는 집이 불에 타는 손짓, 총 쏘는 시늉을 계속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30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열린 4·3 직권재심 재판은 유족들의 증언으로 눈물범벅이 됐다.

 

문창선씨가 4·3 때 밭에서 일하다 연행된 뒤 행방불명된 큰 오빠(문창호)가 연행된 일을 증언하자, 방청객들이 이곳저곳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큰 오빠가 연행될 때 그의 나이는 10대였다. 문씨는 “어머니는 말을 하지 못한 채 한을 평생 눈물로만 말했다”며 “어렴풋하게 7년형을 받은 사실을 알지만,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몰라 생일에 제사한다”고 했다.

 

제주지방법원 4·3 전담재판부 재판장인 장찬수 부장판사가 물었다.

“어머니가 청각장애인인데 말도 못 듣고 녹두를 따는데 큰오빠를 잡아갔다는 얘기인가요?”

문씨가 답변했다.

“어머니는 말을 못하니까 눈으로 봐서 아는 겁니다. 내가 태어나 자라면서 어머니한테 큰 오빠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울면서 수화로 해줬습니다. 심어(잡아)가는 시늉만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몇 번의 질문을 던진 장 판사는 문씨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내 눈앞에서 아들이 잡혀가는데 장애 때문에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면 얼마나 슬플까요.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얼마나 많은 한을 품었겠습니까.”

 

 

* 제주4·3희생자유족회가 지난 5월31일 4·3 군사재판 직권재심 및 일반재판 특별재심 무죄 판결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허호준 기자

 

 

양성홍 4·3유족회 행방불명인협의회장도 증언석에 앉았다. 양 회장은 어느 날 아버지가 끌려간 뒤 대전형무소에서 편지를 두 차례 보낸 뒤 행방불명됐다고 했다. 양 회장은 “아버지가 끌려간 지 73년 만에 재심 재판을 하게 된 걸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안 계시고, 사진도 한장 남기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어떻게 생기셨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너 거울강(가서) 보라. 너영(와) 똑같이 생겼져’ 라고 말했습니다. 살아오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관해 물으면, 어머니는 언제나 ‘좀좀허라’(잠자코 있어라)라고만 했습니다.”

 

울먹이면서 끊길 듯한 양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돈이 없어서 대학은 못 가고 사관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연좌제 때문에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1999년 신문에서 아버지가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여서 어머니한테 아버지 사망신고를 하자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러더군요. ‘아니다. 아방은 돌아올 거다.’”

 

양 회장은 2010년 들어 4·3유족회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자신과 같은 연좌제 피해가 적용될까 봐 우려해서다.

 

5살 때 아버지가 연행된 뒤 소식이 끊긴 부산에 사는 김성자(79)씨는 “살아오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운을 뗀 뒤 “지금까지 살아온 생각 하면 서럽고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한 달이면 보름은 영도 다리를 건넙니다. 추운 겨울날 영도 다리 밑에 흐르는 찬물만 바라보면, (어디선가 수장됐을)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어린 손자들을 데리고 검질(김) 매러 밭에 가면 ‘이런 것들을 놔두고 어디 가시니(갔느냐)’하면서 한탄하며 땅을 쳤습니다.”

 

김씨는 “아버지가 살아 있어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보상이나 제대로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운자(83)씨는 일제 강점기 때 징병 다녀온 오빠(이방익)가 4·3 때 경찰에 연행된 뒤 행방불명됐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이씨는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 제주4·3평화공원 내 1만5천여명의 희생자 위패를 모신 위패봉안실. 허호준 기자

 

 

“오빠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이 터질 때 있었지만 살아서 돌아왔어요. 모두가 운이 좋았다고 했어요. 4·3이 난 가을 어느 날 아침에 오빠와 아침 식사를 하는데 경찰이 와서 잡아갔습니다. 어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도립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언니는 2연대 헌병대가 눈독을 들여서 가족을 구하려고 군인과 강제로 결혼시켰습니다. 그 언니는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됐습니다. 어머니의 한을 풀고 싶습니다.”

 

장찬수 판사는 “집안이 멸족당하지 않게 하려고 시집을 보내기도 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 다른 이유로 희생을 강요당한 것이다. 할머니 말씀처럼 가족을 살리려고 결혼한 분들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겠나. 삶이 아픈 경우도 많았었나 보다”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변진환 검사는 직권재심 청구인들에 대한 무죄를 요청하면서 “국가공권력의 부당하고 위법한 행위를 바로잡기를 바란다. 유족들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하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주지방법원 형사4-1부(재판장 장찬수)는 광주고검 산하 제주4·3사건직권재심권고합동수행단(단장 이제관)이 재심을 청구한 4·3 군법회의 수형인 30명에 대한 직권재심 재판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