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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협력외교와 ‘동북아 탈냉전 청사진’ 9·19공동성명의 탄생

道雨 2022. 9. 6. 09:53

한·중 협력외교와 ‘동북아 탈냉전 청사진’ 9·19공동성명의 탄생

 

 

 

 

* 추석 연휴 마지막날인 2005년 9월19일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베이징 댜오위타이(조어대) 팡페이위안(방비원)에서 6자회담 최초의 문서 합의이자 ‘동북아 탈냉전 청사진’으로 불린 9·19 공동성명 합의·채택에 성공한 뒤 환한 낯빛으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 송민순 한국 외교통상부 차관보,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교부 차관. 연합뉴스

 

 

4차 6자회담은, 3차 회담이 눈에 띄는 성과 없이 끝나고 13개월이 흐른 뒤에야 어렵사리 열렸다. 그사이 북한은 6자회담 참가 무기한 중단 방침을 밝히며 “우리 인민이 선택한 사상과 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고를 늘리기 위한 대책을 취할 것”이라고 ‘핵보유 선언’(2005년 2월10일 외무성 성명)을 한 터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

 

하지만 밤이 깊을수록 새벽도 가깝다고 했던가?

절박한 상황을 앞에 두고 4차 회담은 1단계 회의(2005년 7월26일~8월7일)와 2단계 회의(2005년 9월13~19일)를 합쳐 모두 20일간 진행됐다. 1차(2003년 9월27~29일)와 2차(2004년 2월25~28일), 3차(2004년 6월23~26일) 회담 기간을 모두 더한 11일의 두배 가까운 장기 협상이었다.

4차 회담에 앞서 한국 수석대표 송민순과 미국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 중국 수석대표이자 6자회담 의장인 우다웨이가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무한정 계속하자”는 데 뜻을 모은 덕분이다.

 

그렇게 6자회담 최고의 성과이자 ‘동북아시아 탈냉전의 청사진’이라 불리는 9·19공동성명이 세상에 나왔다. 4차 6자회담과 그 결과물인 9·19공동성명은, 국가이익을 관철하는 세 수단(전쟁·외교·공작) 가운데 왜 외교가 더 바람직할뿐더러 우월한지, 왜 외교를 포기하면 안 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6자회담은 어떻게 1·2·3차 회담의 지지부진을 떨치고 4차 회담에서 ‘퀀텀점프’를 할 수 있었을까?

4차 회담의 주역 가운데 한명인 송민순은 “1차 6자회담부터 실패를 거듭하며 바닥을 다져”온 결과라고,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 적었다.

외교 협상에선 결렬도 성과다. 지레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경청하고 소통하며 신뢰를 쌓으면 마침내 길이 열린다.

 

4차 회담을 1·2·3차 회담과 다르게 만든 가장 눈에 띄는 동력은 “미국의 대북정책,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라는 6자회담 의장의 한탄을 낳은 조지 부시 행정부의 변화였다. 4차 회담은 “미 행정부 내에서 일어난 세가지 중대한 변화의 결과였다”고, 찰스 프리처드는 <실패한 외교>에 적었다.

 

프리처드가 꼽은 세가지는 이렇다.

첫째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는 (중간) 결론”, 둘째 그에 따른 콘돌리자 라이스의 “국무장관 임명”, 셋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6자회담 수석대표로 임명한 것”이다. 프리처드는 힐을 수석대표로 임명(2005년 2월)한 것이 “전술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했다고 짚었다.

 

4차 회담 때 한국의 회담 전략을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통해 조율한 이종석은 라이스의 취임을 계기로 “미 국무부가 (딕) 체니 부통령 등이 지지하는 강압외교에 맞서 협상 지향의 외교적 방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칼날 위의 평화>에 적었다.

 

힐은 2005년 7월9일 베이징 세인트레지스호텔 뒤편 비즈니스센터 다이닝룸에서 북한 수석대표 김계관과 만찬을 겸한 비공개 북·미 양자협상을 벌였다. 라이스-힐의 ‘북·미 양자협상’은 네오콘한테는 혐오스러운 선택이었겠지만, 북이 ‘미국의 변화’를 체감할 증거로 작용했다.

힐이 밥값을 낸 그날 만찬 자리에서 북은 6자회담 재개에 합의했다. 힐은 ‘중국을 끼고 북을 만나라’는 상부의 지침과 ‘중국을 끼고는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북 사이에서 위험부담을 안고 김계관과 일대일로 마주앉기를 피하지 않았다.

 

이런 힐을 두고 일본에선 “김정힐”(김정일+힐)이라는 조롱조의 별명이 나돌았지만, 한국에선 “상급자들을 설득시킬 만한 정치력과 합리적인 판단력”(이종석)을 지닌 “결과지향적 협상가”(송민순)라는 후한 평가가 나왔다.

그날 힐한테 밥을 얻어먹은 김계관은, 4차 회담 1단계 회기 중인 2005년 7월30일, 베이징의 북한식당 ‘해당화’로 힐을 초청해 만찬 협의를 하는 것으로 답례했다.

 

미국의 변화만으로 4차 회담이 가능했던 건 물론 아니다. 중국은 탕자쉬안 국무위원을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특사로 평양에 보내 김정일 국방위원장한테서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발언을 끌어냈다.

한국은 평양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기념 남북공동행사 계기에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미국이 우리를 존중하고 인정하면 (4차 회담을) 7월에 할 수 있다”는 말을 끌어냈다. 미국의 태도 변화에 한·중의 협력적 대북 설득이 결합해 6자회담 재개로 이어진 셈이다.

 

노무현 정부는 평행선을 달리는 북·미 사이에 다리를 놓아 6자회담을 성사시키려, 경수로 건설 사업을 종료하는 대신 북핵 폐기 때 남이 북에 200만㎾의 전력을 직접 송전하는 ‘중대제안’, 곧 “경수로-대북전력지원 교환 방안”(이종석)을 정동영 장관이 김정일 위원장한테 직접 설명하고, 2005년 7월12일 공식·공개 제안했다. ‘중대제안’은 9·19공동성명 3조에 명기됐다.

 

6자회담 참가국들이 20일 동안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인 4차 회담의 1·2단계 회의를 관통한 핵심 쟁점은, 북의 핵 폐기 범위와 경수로 문제였다. 당연하게도 최후의 순간까지 대립의 축은 북·미였다.

북은 ‘현존하는 모든 핵무기와 핵계획’을 포기할 수 있지만, 경수로로 상징되는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 권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미국은 북의 ‘모든 핵무기와 핵계획 폐기’ 약속이 확보돼야 하며, 경수로의 ‘경’자도 협상에서 거론돼선 안 된다는 태도였다.

 

북·미의 협상 전략을 깊이 따져보면, ‘북핵 폐기’ 문제는 접점의 여지가 있었다. 문제는 경수로 문제에서 평행선을 긋는 북·미의 상반된 협상 전략이었다. 힐은 지침에 따라 경수로를 거론할 수 없었는데, 김계관은 경수로를 “기본의 기본”이자 “모든 것을 푸는 열쇠”라고 거듭 강조했다고 송민순은 <빙하는 움직인다>에 적었다.

요컨대 4차 회담의 성패는 경수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달리 말하면 미국이 경수로 문제를 북의 핵폐기 약속을 끌어낼 협상 카드로 쓸지에 달렸다.

 

부시 대통령은 6자회담장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날마다 보고받”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북을 설득해야 할 힐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여주지 않았다.

힐은 “나는 북한이 핵프로그램 폐기 대가로 경수로를 요구하는 협상에서 거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회고록 <미국 외교의 최전선>에 적었다.

이어 “북한과 접촉에 적대감을 지닌 (워싱턴의) 네오콘과 초강경보수주의자들은, 북한 사람들이 포함된 어떤 공식 자리에서도 건배하지 말라”는 지침을 문서로 보내왔다고 밝혔다.

 

경수로를 둘러싼 가망없는 대치 와중에, 한국과 중국이 눈부신 협력외교로 난파 위기의 6자회담을 구하고, 9·19공동성명으로 가는 다리를 놓았다.

한·중은 쓸 수 있는 모든 외교력을 동원해 북의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 포기”와 함께, 한·미·중·일·러가 “적절한 시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경수로 제공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데 동의했다”는 문구를 병기하기로 뜻을 모으고, 북·미를 돌려세우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한국이 대응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상황을 만들고 다른 나라들이 이에 대응하게 만들어야겠다”(<빙하는 움직인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대통령(노무현)-외교장관(반기문)-6자회담 수석대표(송민순) 등이 모두 나서 미국 쪽 상대를 설득한 용기있는 협상 전략은 한국 외교사에 특기할 만하다.

 

한·중의 협력외교와 북·미의 전략적 선택의 산물인 9·19공동성명엔, 동북아의 냉전 질서를 협력적 탈냉전 질서로 바꿔가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요소가 담겨 있다.

탈냉전기 동북아 역내 안보 질서의 뇌관으로 작용해온 ‘북핵 문제’를 해소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 달성”(1조),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2조), 6자의 “에너지·교역·투자 분야 경제협력, 양자·다자적 증진”(3조), “직접 관련 당사국들의 한반도 영구 평화체제 관련 협상”과 “6자의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 모색”(4조) 등이 그것이다.

 

6자 수석대표들은 2005년 9월19일 낮 12시 시작된 4차 회담 2단계 회의 폐막회의에서 9·19공동성명을 합의·채택하며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첫걸음”(송민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합의”(알렉세예프), “만리장정의 첫걸음”(우다웨이), “조선반도 비핵화의 첫걸음을 뗄 기초”(김계관)라고 자평했다.

그날은 한국인이 가장 중시하는 명절인 추석 연휴의 마지막날이었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