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군주의 시대…참사 책임보다 무거운 불경죄

道雨 2022. 11. 28. 09:20

군주의 시대…참사 책임보다 무거운 불경죄

 

 

 

윤석열 대통령의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 중단 사태를 거치며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

 

우선 현 정부 출범 이후 책임지는 공직자가 드디어(!) 등장했다. 김영태 대통령실 대외협력비서관은 이번 사태의 직접 원인인 <문화방송>(MBC) 기자와 대통령실의 충돌과 관련해 “불미스러운 일에 도덕적 책임감을 느낀다”며 사퇴했는데, 정부 출범 이후 숱한 책임론이 불거졌지만, 공개적으로 도의적 책임을 언급하며 물러난 이는 김 전 비서관이 유일한 것 같다.

 

‘책임의 무게’라는 화두도 던져줬다. 대외협력비서관 업무가 대통령실 출입기자단과의 소통 및 출근길 문답 관리 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김 전 비서관의 도덕적 책임이란 ‘기자를 통제하지 못한 책임’으로 귀결된다. ‘불미스러운 일’의 당사자인 이기정 홍보기획비서관은 건재하다.

 

무엇보다 158명이 숨진 이태원 참사에도 주무 장관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사퇴는커녕 “고생했다”는 격려까지 받았지만, ‘기자 관리’에 실패해 대통령 심기를 불편하게 한 비서관은 직을 내놓아야 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불경죄가 참사 책임을 압도한 모양새다. 심각한 민심 역주행이다.

 

윤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며 ‘용산 시대’를 선언했지만, 실제 윤 대통령이 열어젖힌 것은 ‘경복궁 시대’인 것 같다. 지금 윤 대통령에게는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민주공화국 대통령이 아닌 군림하는 군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사과 한마디면 끝났을 정상회담 비속어 논란이, 문화방송 전용기 탑승 배제, 출근길 문답 중단으로 엉뚱하게 확대 재생산된 배경에는, 윤 대통령의 고집과 독단이 있다.

윤 대통령이 밝힌 ‘동맹 훼손’ ‘국익 침해’ 등의 이유는 모두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대통령 전용기에 비판 언론을 태우지 않겠다는 결정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전용기를 개인 제트기 정도로 여긴다는 의구심을 낳았다. 그 와중에 전용기 안에서 자신과 가까운 기자들을 따로 불러 ‘개인적 대화’를 나눴다는 것은, 대통령직이 가진 공공성에 대한 몰이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대통령실은 출근길 문답 중단 이유로, 돌아서는 윤 대통령을 향해 항의성 질문을 한 문화방송 기자의 태도와 참모와의 설전을 문제 삼았다. 재발방지책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문답을 재개하기 어렵다는 입장도 내놨다.

그런데 기자들이 돌아서는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그간 예사로 있던 일이고, 윤 대통령은 심지어 지난 8월 “대통령님 파이팅” 구호에 활짝 웃으며 되돌아와 추가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유일한 잣대는 대통령의 심기뿐이다.

 

출근길 문답으로 국민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방식은 윤 대통령 스스로가 내세운 원칙이다. ‘참모 뒤에 숨는 대통령’ ‘군림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이자, 대통령실 이전의 핵심 근거이기도 했다. 비판 언론과의 갈등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마음대로 그만두는 것도 권력의 오만이다.

 

윤 대통령이 주장하는 ‘국익’은 김건희 여사에게도 적용된다. 대통령실은 최근 김건희 여사의 캄보디아 심장병 어린이 방문 사진에 ‘조명 활용’ 의혹을 제기한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국익을 침해해 묵과하기 어렵다”면서 경찰에 고발했다. 김 여사 주변의 비선 논란, 이권 개입 의혹에는 뭉개기로 일관한다.

국정 운영이 윤 대통령의 사적 감정에 기반한 즉흥적 결정에 좌우된다는 의심이 퍼져가고, 여권에서조차 ‘지금이 쓰레빠, 조명 갖고 감정싸움할 때인가’라는 한탄이 흘러나온다.

 

윤 대통령이 스스로 경계했듯이 대통령은 제왕이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신중히 행사하는 것은 물론, 감시와 견제를 받을 의무가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검찰 편중 인사, 국외 순방에 지인 동행, 대통령실 사적 채용 등으로 끊임없이 권력 사유화 논란을 빚더니, 이제는 비판 언론을 향한 노골적 보복마저 ‘헌법 수호’로 강변하는 데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태원 참사 한달이 되어가도록 윤 대통령은 ‘아랫사람’을 향해 호통만 쳤을 뿐, 자신의 책임은 인정한 적이 없다. 국민 생명·안전의 책임자로서 대국민 사과도, 행정부 수반으로서 문책도 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독단적 스타일에 대통령실과 여당은 참모·동반자보다는 대통령 눈치 보기에 급급한 ‘신하’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이러다간 2024년 총선의 주요 화두가 ‘민주주의 회복’이 될지 모르겠다.

 

 

 

최혜정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