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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군사합의’ 효력정지 검토 지시, 섣부르고 위험하다

道雨 2023. 1. 5. 09:19

‘9·19 군사합의’ 효력정지 검토 지시, 섣부르고 위험하다

 

 

 

*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4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북한의 추가 영공 침범 시 9·19 남북 군사합의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남북 군사합의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의 추가 ‘영토 침범’을 가정한 ‘검토’ 지시라서 당장 합의 파기 절차를 밟는 건 아니지만, 애초 남북 간 합의의 의미가 우발적인 확전 방지에 있음을 고려할 때, 섣부르고 위험한 발언이다.

새해 초부터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윤 대통령이 연일 거칠고 강한 수위의 발언으로 맞서며, 한반도에서 우발적 충돌 위험을 높이는 상황이 몹시 우려스럽다.

 

2018년 제3차 남북정상회담과 9·19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작성된 군사합의는 “지상과 해상, 공중 등 모든 공간에서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명시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윤석열 정부 출범 뒤 마치 인내심을 시험하듯 이 합의를 위반해, 수많은 도발을 자행해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동·서해상 북방한계선(NLL) 북방 해상 완충구역 안으로 해안포 사격을 한 이래 모두 15건에 이른다.

특히 지난달 26일 소형 무인기 5대를 군사분계선(MDL) 이남으로 침투시켜 서울 상공까지 휘젓고 다닌 사례는 합의를 대놓고 무시한 것이다. 윤 대통령의 지시는 이 무인기 사태에서 비롯된 충격과 그 여파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9·19 군사합의’의 의미와 효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합의는 접경 지역에서 확전 방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소하고 우발적인 충돌이 국지전이나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인 것이다.

북한이 먼저 합의를 무력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의 맞대응을 하게 되면 자칫 명분도 잃고 실익도 놓칠 수 있다. 지금은 합의라는 기준이 있기에 북한의 위반을 비판하고 준수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북한이 여러 차례 위반했다고 해서 우리가 먼저 파기를 언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은 대통령이 “일전 불사의 결기”, “보복과 응징”을 외치는 대신, 더 큰 인내심을 갖고 북한의 합의 준수를 강력히 요구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설령 그 효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합의라는 안전장치를 우리가 먼저 걷어냄으로써 지금보다 더 위험한 상황을 자초할 이유는 없다. 일부 보수층이 강경 대응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안보는 전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윤 대통령과 정부의 신중한 접근과 대응이 절실하다.

 

 

 

[ 2023. 1. 5  한겨레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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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김정은 ‘치킨게임’…한반도 ‘안전판’ 벼랑 끝으로

 

 

* 2018년 9월19일 평양 백화원영빈관에서 송영무 당시 국방부 장관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이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9·19 군사분야 합의서)에 서명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그 뒤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박수를 치고 있다. 평양 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이 다시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4일 발언을 계기로, 남북관계의 안전판으로 불리는 ‘남북 9·19 군사분야 합의’가 파기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지난 1일 알려진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남조선 괴뢰들은 명백한 적” 발언과 같은 날 나온 윤 대통령의 “일전 불사 결기” 주문으로, 한껏 올라간 긴장에 우발적 충돌 위험까지 더해졌다.

 

 2018년 남북이 맺은 9·19 군사합의는,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육상·해상·공중 완충구역에서 적대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 뼈대다. 접경 지역에서 우발적 무력충돌을 막자는 목적이다.

9·19 군사합의의 효력이 정지되면, 남북 모두 충격 완화 장치가 사라지는 위험을 안게 된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에도 “(북한의) 변화가 없고 계속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라고만 하면, 우리도 합의를 계속 지키기가 어렵다”며,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언급했다. 다만, 북쪽이 남북 사이 군사적 충돌을 각오하지 않는 한, ‘영토 침범’은 쉽사리 일어날 일은 아니다.

윤 대통령도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말뜻대로라면, 북쪽의 9·19 군사합의 추가 위반만으론 ‘효력 정지 검토’의 조건이 충족되지는 않는다. 

 

 

남북관계에서 정부가 인식하는 영토 침범은 육지에선 군사분계선, 바다에선 북방한계선(NLL) 침범을 뜻한다. 지난해 10월14일 북쪽의 북방한계선 북방 동·서해 해상 완충구역 안 포사격은 9·19 군사합의 위반이지만 영토 침범은 아니다.

반면 지난해 12월26일 서울 북쪽 상공까지 날아든 북쪽의 ‘소형 무인기 사태’는 영토 침범이다. 지난해 11월2일 북한이 쏜 미사일이 동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공해에 떨어졌을 때, 윤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실질적 영토 침해 행위”라고 밝혔다. 

 

문제는 남과 북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서로를 적으로 몰아세우며, 배신(합의 위반)에 보복으로 대응하는 ‘팃포탯’과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겁쟁이 게임’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한겨레>에 “북한의 도발에 대해 압도적 대응을 해야만 북한의 도발 의지가 무력화된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정상이 직접 나서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형국이다.

 

지난해 11월2일 북쪽이 쏜 미사일이 동해 북방한계선 이남 공해에 떨어져 울릉도 지역에 공습경보가 발령되자, 남쪽이 전투기를 띄워 공대지미사일 3발을 “상응 거리에 해상 정밀사격”한 상황이 대표적이다.

그날 남북 모두 9·19 군사합의를 위반했다.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 검토라는 윤 대통령의 ‘경고’를 김 총비서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다고 전문가들이 보는 까닭이다.

 

전문가들은 무력시위를 이어가는 북한이 “(북방한계선 등) ‘회색 지대’ 도발에 나설 위험이 높다”고 우려한다. 만약 윤 대통령이 설정한 금지선을 김 총비서가 건드리기로 결심한다면, 그 대상은 육지의 군사분계선 쪽보다는 바다의 북방한계선 쪽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군사분계선 침범은 국제법적 효력을 지닌 정전협정 위반이지만, 북방한계선은 유엔군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선이기 때문에 북방한계선 침범 자체로는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