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증오의 명분으로 이용되는 당파성

道雨 2023. 2. 13. 10:09

증오의 명분으로 이용되는 당파성

 

 

다른 인종을 폄하하는 데 전념하는 미디어 채널은 없다.

다른 젠더를 폄하하는 데 전념하는 미디어 채널도 없다.

아니 전혀 없진 않지만,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그런 일로 사회적 주목을 받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디어 채널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양지에서 다른 정당이나 정치적 정체성을 폄하하는 데 전념하는 미디어 채널은 있다. 아니 있는 정도를 넘어서 많다. 그것도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

우리는 이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당연하게 생각한다.

당파적 적대감은 우리 사회가 허용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몇 안 되는 차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인 에즈라 클라인의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2020)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 현실에 대해 정치학자 샨토 아이엔가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적 정체성은 증오를 위한 만만한 구실입니다. 인종 정체성이나 젠더 정체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정체성은 예외입니다.”

 

이 점에 관한 한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미국과 비슷한 나라다.

다른 정치적 정체성을 비난하는 데 전념하는 미디어 채널들은 디지털 혁명 덕분에 성장산업이 된 지 오래다. 지식인들도 그런 채널들에 의탁해 명성을 유지하면서, 적대 세력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원하는 팬덤의 수요에 적극 부응한다.

 

이렇듯 증오의 명분으로 이용되는 당파성은 국가와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한다. 하지만 그런 분열로 밥을 먹고 이름을 얻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 막강한 기득권층을 형성하면서, 정치는 ‘분열 산업’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론적으론 문제 될 게 없다. 갈등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엔진’(샤트슈나이더)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갈등이냐 하는 것이다.

선과 악의 구도가 뚜렷이 형성돼 ‘우리’와 ‘그들’ 간의 반목으로 치닫게 된 갈등, 즉 ‘고도 갈등’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갈등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 문제에 주목해온 언론인 어맨다 리플리는 <극한 갈등: 분노와 증오의 블랙홀에서 살아남는 법>(202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진영 간의 대립 구도를 부추기는 모든 운동은, 폭력의 여부와 상관없이 안으로부터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도 갈등은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을 선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는 관점은, 그 자체로 편협하고 제한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런 관점은 많은 사람의 힘을 규합하여 어려운 문제를 풀고자 하는 노력을 방해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간 나온 각종 ‘갈등’ 관련 국제조사에서 한국은 세계 1위 아니면 최상위권을 점할 정도로 명실상부한 ‘갈등 공화국’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국갤럽 조사에선 국민의힘 지지자의 89%, 더불어민주당 지지자의 92%가 상대 정당이 싫다고 답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좋다고 답한 비율은 국민의힘 지지자의 70%, 더불어민주당 지지자의 73%에 머물렀다.

이게 바로 한국 정당들이 스스로 잘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상대 정당을 비난하는 선전·선동에 모든 걸 바치는 배경이자 이유가 되고 있다.

 

더욱 비극적인 건 정당 내부에서도 그런 갈등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국민의힘에서 당대표 선출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은 “누가 더 잘할 수 있나” 경쟁이 아니라 “누구는 절대 안 돼”라며 찍어내는 제거 ‘경쟁’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 윤석열은 주변에 “무례의 극치”라는 말을 했다는데, 그 말이 누구를 겨냥했건 대통령 자신의 그런 거친 개입 행태가 국민에 대한 “무례의 극치”라는 건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걸까?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는 걸까. 아직 정권 출범 1년도 안 됐는데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윤석열과 국민의힘의 한심한 모습은, 당파성이 증오의 명분으로 이용돼온 역사의 업보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과는 일을 같이할 수 없고 협력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일반 유권자들마저 오염시키고 말았다.

“정치 성향 다르면 밥도 먹기 싫다”는 사람이 40%나 된다는 어느 여론조사 결과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런 사회에서 정치와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하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정치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실은 우리는 상대편에 대한 반감과 증오의 배설 경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기술 변화에 맞는 민주주의를 재설계할 때가 된 건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먼저 대통령의 대오각성이 필요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