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 제국’을 뒤흔든 풍선 하나
미국은 ‘필연적 제국’(inevitable empire)이라는 말이 있다. 이 나라의 특출한 지정학적 강점들 때문에 생긴 표현이다. 땅은 넓고 자원도 풍부하다. 이웃들(멕시코·캐나다)은 군사적으로 약체이고 적대적이지 않다.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바다가 천연 장벽이 돼준다. 역사상 다른 어떤 제국도 갖지 못한 호조건들이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국의 지정학적 운명도 흔히 얘기한다.
예전엔 사면에서 적을 맞는다고 사면수적(四面受敵)이라는 말도 썼다.
혼자만 서러워할 일은 아니다. 강대국들도 이런 운명에 속박된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는 영국과 독일 사이에,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러시아는 독일과 일본 사이에 끼었다. 물고 물리는 구조 속에 좌우가 협공하면 큰 곤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과 달리 작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륙과 떨어진 영국과 일본은 상대적으로 외부 위협에서 자유로웠다.
하물며 광대한 바다를 좌우에 낀 미국의 안보적 이점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군사력이 약했던 신생국 시기 영국군에 수도 워싱턴을 점령당한 ‘1812년 전쟁’ 이래 200년 넘도록, 미국 본토가 외적의 군홧발에 짓밟힌 적은 없다.
미군은 본토와 한참 떨어진 곳에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위협이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막아왔다. 냉전이 한창일 때 본토를 지키는 병력은 1개 사단에 불과한 적도 있었다. 미국에 전쟁은 늘 외국 땅, 다른 대륙에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62년 소련이 미국 코앞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다 핵전쟁 직전까지 간 ‘쿠바 미사일 위기’처럼 신화를 뒤흔드는 일도 있었다. 2차대전 때는 독일 잠수함들이 미국 동부 해안에 출몰해 소동이 벌어졌다.
최근 중국 기구(정찰 풍선)의 영공 침입은 미국의 이런 불가침성에 상처를 냈다. 중국은 민간 연구용 기구가 바람에 표류했을 뿐이라고 했다. 미국은 군사용 정찰 기구가 분명하다고 한다. 미국은 중국이 지난 수년간 전세계에서 기구로 정찰 활동을 했다는 주장까지 하고 나섰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 기구가 ‘거대한 요새’인 미국 본토를 가로지른 것은 상징적 효과가 크다. 서울 상공을 휘젓고 다닌 북한 무인기에 빗대면 ‘미국판 무인기 사건’이다.
<시엔엔>(CNN)은 “미국인들은 베이징이 가하는 안보 위협의 실재하는 상징을 경험했다”고 했다.
1970년대 초에 마오쩌둥이 미국이 내민 손을 잡은 것은 사면수적의 위기감이 배경에 있었다. 북쪽엔 소련이, 동쪽엔 일본이, 서남쪽엔 인도가, 남쪽 베트남엔 전쟁 때문에 대규모 미군 병력이 있었다. 대만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지금 중국으로선 당시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러시아(옛 소련)와는 관계가 좋아졌지만 다른 방면들에선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
이런 맥락 때문에 중국이 바둑돌을 하나 놓은 게 아니냐는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전방에서 한창 압박을 받을 때 후방을 교란하는 수를 던졌다는 말이다. ‘당신네 안방도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은근한 메시지가 아니겠냐는 추측이다.
맨눈으로도 뻔히 보이는 버스 3개 크기의 기구를 고의로 보냈겠냐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일부러 눈에 띄게 행동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어떤 게 진실인지보다,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가 중요한 경우가 많다.
알래스카주부터 사우스캐롤라이나주까지 펼쳐진 ‘기구 쇼’가 미국인들의 공포와 반감을 키운 게 가장 심각한 측면이다.
이본영 |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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