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한-미 간 역설적 가치동맹과 그 비용

道雨 2023. 5. 25. 09:17

한-미 간 역설적 가치동맹과 그 비용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징크스처럼 일어난다.

지난 21일 중국이 자국 기관과 기업들에 미국 마이크론사 반도체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미국은 바로 동맹국들과 협력해 대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때 동맹국은 반도체 주요 수출국인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지난 4월 말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 직전, 중국이 미국산 반도체 수출을 제한할 경우, 한국이 그 부족분을 메우지 못하도록,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고 있다고 외신이 전했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미-중 반도체 전쟁에 우리나라가 말려드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었던 시나리오였다. 불행히도 현실이 됐다.

 

기술전쟁에서 지금까지 미국은 일방적으로 중국에 무역 및 투자 제한 조치를 했다.

중국은 특별한 보복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몇달 전부터 미국산 반도체 보안 심사를 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보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달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끝나자, 중국은 행동에 나섰다. 이것은 아마도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일 것이다.

중국의 행동은 앞으로 미국 중심의 동맹에 균열을 가져올 것이다. 동맹국들이 모두 경제적으로 중국과 긴밀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

 

소위 가치동맹의 경제적 성격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같은 군사적 동맹과는 다른 것이다. 나토는 동맹국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함께 참전해 동맹국의 안보를 책임지는 집단 안보동맹이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가 가치동맹의 이름으로 추진하는 대외 경제정책의 목적은 동맹국 경제적 이익의 집단적 확보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자신의 공급망을 강화하고 중국을 억제하며, 노동자 보호라는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동맹국을 활용하려는 것이다.

 

지난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이 브루킹스연구소에서 한 연설에서 정책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바이든 정부 정책 방향에 관한 가장 분명하고 체계적인 설명으로 평가받는 이 연설에서, 설리번은 붕괴한 미국의 산업 기반 회복이 궁극적 목표라고 말했다.

미국의 전통 산업은 쇠퇴하고, 미래를 이끌 전략 산업도 부족하다고 평가한 다음, 그런 산업 붕괴의 근저에는 단순화된 시장경제 논리가 있다고 했다. 즉 감세와 규제 완화, 민영화, 무역 자유화가 산업의 공동화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수효과에 기댄 보수적 정책들이 미국 노동자의 경제적 기반을 허물고 경제 불평등을 심화시켰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등장해 민주주의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바이든 정부는 이런 과거 정책을 뒤집고, 대신 경제의 공급망과 포용성 강화를 위해 ‘노동자 계층을 위한 무역정책’을 실시하겠다고 한다.

 

설리번의 연설에 따르면, 바이든 정부가 지향하는 가치와 정책 방향은 윤석열 정부와 정확히 반대다. 윤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낙수효과를 거론하며 감세에 나섰다. 불평등 완화와 포용성 강화는 정책 목표에서 사라졌으며, 빈말로도 언급하지 않는다.

정반대의 가치를 지향하는 두 정부가, 그 어느 때보다 강고한 가치동맹을 맺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런 역설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이 필요로 했던 것은 가치의 일치가 아니라, 자기 목표 달성을 도와줄 수 있는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설리번의 연설이 끝나자 청중석에서 질문이 나왔다.

미국은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동맹국이 필요하지만, 이 정책은 불가피하게 동맹국의 이익을 침해할 것이다. 이것은 모순적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제적 이익이 우리의 경제적 이익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 이익이 침해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한-미 동맹이라는 이름 속에 계속 덮어둘 수는 없게 됐다. 미국 공급망이 강화된다고 해서 우리 공급망이 강화되지는 않는다. 공급망 강화와 분산을 위해 우리는 중국도 필요하고 동남아시아도 필요하다. 중국 견제가 미국에는 절실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정학적 안정과 자유로운 무역 환경이다.

대중국 중간재 수출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중국의 소비재 시장이 필요하고, 그래서 중국과의 조화로운 관계가 필요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미국 중심 동맹의 응집을 가져왔다면, 중국의 반발은 그 균열을 가져올 것이다.

지금부터는 철저히 우리의 이익을 위한 시간이 돼야 한다.

 

 

 

박복영 | 경희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보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