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사도광산, 외교와 역사의 포기

道雨 2024. 8. 7. 09:42

사도광산, 외교와 역사의 포기

 

 

 

‘세계유산 문제는 역사전쟁이나 마찬가지.’

일본 우익 정치단체가 2022년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로 추천하라며, 기시다 정부를 압박할 때 썼던 표현이다. 식민지 시기 1500여명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고통의 장소인 사도광산이, 피해국 한국의 동의 없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가해의 역사를 인정할 여지도 크지 않았다.

 

이 모순 속 일본 내부에서도 ‘안 될 텐데 왜 하냐?’는 회의론이 상당했다. 그러나 사도광산은 지난달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가해국이 역사전쟁에서 이긴 과정은 피해국, 정확히는 윤석열 정부가 외교와 역사를 포기한 과정이었다.

 

사도광산 쟁점은 한·일 과거사 쟁점 전체를 통틀어 한국이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했던 사건이었다.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한국은 피해국 지위를 넘어 투표권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일본은 2007년 이후 근대산업 시설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는데, 그중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던 시설이 있었다.

첫번째가 2015년에 등재된 군함도(하시마섬)였다. 일본은 등재 과정에서 ‘한국인 등이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가혹한 조건 속 강제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공식 인정했고, ‘희생자 추모 시설을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겨우 등재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 시기 중요한 성과였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등재 이후 5년이 지난 2020년이 되어서야, ‘산업유산정보센터’라는 이름의 전시시설이 겨우 설치됐다. 사전 신청 없이는 입장할 수 없고, 내부 촬영도 금지된 폐쇄적인 시설이었다. 무엇보다 전시 내용에 노골적인 역사 왜곡이 가득했다.

유네스코는 일본이 약속을 어긴 것에 ‘강한 유감’을 반복적으로 표명했다.

반면 한국은 2023년 만장일치로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되는 구조 속 투표권을 가진 위원국이 되었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바탕으로, 한국은 역사에 눈감고 있는 일본에 ‘그러지 마시라’며 설득하고, ‘고통의 역사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보편적 가치를 세계에 상기시킬 수 있었다.

결과는? 2015년 군함도 때보다 훨씬 후퇴해, 사실상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실은 “일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얻어냈다”고 말하지만, 거짓말에 가깝다. 외교를 포기해놓고, 외교를 했다는 거짓말 말이다.

 

 

윤석열 정부는 역사를 포기했다.

사도광산 등재 과정에서 한국은 세가지를 요구했어야 한다.

첫번째는 2015년의 약속을 온전히, 제대로 이행하겠다는 약속이다.

두번째로는 사도광산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입장 표명이다. ‘조선반도에서 온 근로자들이 여기서 고생했다’와 같이 맥락을 삭제한 교묘한 왜곡이 아니라, 2015년 군함도 등재 시 한국 정부가 요구해 일본 정부가 확인한 강제동원(강제노동) 사실이 분명히 포함된 입장 표명이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군함도의 뒤통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세계유산 지역 ‘내부’에, ‘강제동원’ 사실이 명시된 전시시설의, ‘즉각’적인 설치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세가지 중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첫번째, 두번째는 전혀 없었다. ‘일본 정부 기존 약속들 명심’, ‘한국인 노동자 추모’와 같은 힘없는 수사들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세번째의 경우 얕은 속임수로 본질을 가렸다. 윤석열 정부는 희생자 전시 조치가 ‘사전’에 이행되었다 목소리를 높인다. 성과라는 거다. 그런가?

세계유산 지역에서 2㎞ 떨어진, 이미 존재하던 향토박물관 한구석에, 강제동원 관련 명시적 표현은 단 한 단어도 없는 전시물이 급조되었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사도광산 유산 지역 내에 최신식 전시공간이 신설되었지만, 정작 그 시설에는 조선인 강제동원 내용이 없다. 군함도 때는 모르고 속았다면, 사도광산 때는 알고도 속고 있다.

 

피해국이 외교와 역사를 포기했을 때, 비극은 피해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심사의 핵심적 기준 중 하나는 ‘전체 역사’이다. 긍정의 역사뿐만 아니라 부정과 반성의 역사까지 온전히 담겨야만 세계인들과 나눌 유산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기억해야만 인류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이 보편적 가치가 사도광산에서 훼손되었다.

피해국이 역사전쟁에서 지는 것은, 그래서 모두의 비극이다.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

 

 

용산과 외교부의 ‘역사 매국’…사도광산 찬성 정해놓고 대놓고 거짓말

 

 

정부가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문제로 일본 정부와 협상하면서,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 동원을 명시해달라는 우리 쪽 요구가 묵살당하고도 이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등재 찬성’이란 결론을 내려놓고 협상에 임했기 때문이란 분석에 힘이 실린다.

앞서 외교부는 지난 6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답변서에서 “전시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강제'라는 단어가 들어간 일본의 과거 사료 및 전시 문안을 일본 측에 요구했으나, 최종적으로 일본은 수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외교부의 답변에 언급된 ‘일본의 과거 사료’는, 사도광산이 위치한 니가타현이 1988년 펴낸 ‘니가타현사 통사편8 근대3’에 나오는 “1939년에 시작된 노무동원 계획은 명칭이 모집, 관 알선, 징용으로 바뀌지만, 조선인을 강제로 연행한 사실은 동질”이라는 내용으로 보인다.

‘조선인 강제동원’을 명시한 일본 쪽 사료는 현지 언론도 몇 차례 보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료조차 일본이 전시를 거부했음에도 한국은 등재에 찬성한 것이다. ‘굴욕적’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 이번 협상 과정에선, 한일관계 개선과 한미일 군사협력을 최대 외교안보 성과로 내세우는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의중에 따라, ‘등재 찬성’이란 답이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

일본 정부 역시 우리 정부가 사도광산 등재를 거부할 가능성은 없다고 간파했다. 그런 만큼 핵심 쟁점인 강제동원 표현에 동의할 이유가 없었고, 한국 협상팀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문제는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지난 6월 등재 ‘보류’ 권고를 내리는 등, 우리 쪽에 유리한 상황이었는데도, ‘강제동원’ 명시를 거부한 일본에 협상 내내 끌려다녔다는 사실이다.

 

외교부는 이재정 의원 쪽에 보낸 답변서에서 “2015년보다 후퇴하는 문안은 국내적으로 수용불가하다는 입장 하에 협상했다”고 강조했다.

 

2015년 일본이 ‘군함도'(하시마 탄광)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끌려와 강제로 일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을, 이번 협상에서도 지켜냈다는 게 외교부의 공식 입장이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식민지배와 강제동원은 불법’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명확히 밝힌 적이 없고, 조태열 외교장관도 사도광산 등재 뒤 ‘일본이 추도식 등 후속조치 이행에 성의를 보여달라’는 입장만 내놨다.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에 이어, 사도광산 등재 찬성까지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의 책임에 잇따라 면죄부를 쥐어준 셈이다.

 

 

 

박민희 선임기자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