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과 독재’가 좋을 수도 있다는 음흉한 역사교과서
한국학력평가원 '고교 한국사'의 양비양시론
친일 서정주, 독재 박정희 "잘한 점도 있다"
집필자 이병철, 뉴라이트 세미나 발제 이력
또다른 집필자 배민은 친일성향 글을 써온 인물
대입 논술에서 최악의 답안지는 바로 양비양시론을 펼친 것이다.
‘양쪽 다 틀리기도 하고 양쪽 다 맞기도 하다’는 황희 정승식 답변은 거의 ‘빵점’을 받기 십상이다.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나타내지 못하고 속내를 감추는 학생은 ‘지성인으로서 부적합한 것’이다.
조중동 등 언론을 넘어 고교 교과서에도 등장한 ‘양비양시론’
언론 기사도 마찬가지다. 양비양시론은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기 십상이다. 오히려 이런 태도는 나쁜 놈(세력) 편을 드는 비겁한 의도를 감춘 경우가 많다.
우리는 조중동 기사에서 ‘여당도 문제지만 야당도 문제’ 혹은 ‘여도 맞고 야도 맞다’라는 양비양시론을 셀 수 없이 봐왔다. 이들의 이런 태도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독자들을 현혹하는 교묘한 기사 작성기법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교육부 검정교과서인 한국학력평가원의 고교<한국사>도 양비양시론 문제가 더 심각하다. 양비양시론의 주제가 다름 아닌 ‘친일과 독재’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비춰봐서도 친일과 독재는 분명히 나쁜 행위다. 이것에 대해 교과서가 양비양시론을 들이대는 행위는 이해 못할 일이다. 역사교과서는 학생들의 세계관 형성을 좌우하는 것이기에 더 그렇다.
이 출판사의 <한국사2> 63쪽 ‘인물 탐구’엔 ‘학도병 독려행위’로 유명한 친일시인 서정주 사진이 내걸려 있다. 이 교과서는 “서정주 시인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토론해 보자”면서 다음처럼 적어놓았다.
“‘국화 옆에서’의 작가 서정주 시인은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토속적인 시어로 보물 같은 시를 많이 남겼다. 이러한 작품 활동으로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사망 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권력에 영합하는 친일파 시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의 친일 행위를 덮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쓴 아름다운 작품들은 우리 문학의 중요한 유산으로 인정해야’라고 주장한다.”
“친일한 서정주와 박정희 쿠데타도 잘 한 점이 있지 않을까?”
같은 교과서의 서정주 소개 부분에서는 “서정주 시인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친일 행위에 대하여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라고 변명하였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끌려가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라고 고백했다”라고 적어놓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친일 변호에 차용되는 논리다.
이 교과서는 독재자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에 대해서도 두 지식인이 쓴 찬반 글을 같은 분량으로 나란히 보여준 뒤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은 무엇인지 각각 말해 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한국사2> 109쪽 ‘자기주도 역사 탐구’에서다.
군사쿠데타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불행한 역사다. 이를 놓고 찬반 의견을 보여주고 ‘양쪽 의견의 핵심을 각각 말해 보자’고 제안하는 행위 자체가, 독재의 씨앗인 쿠데타에 대한 양비양시론을 부추기는 행위다.
사실, 이 교과서는 과거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와 박근혜 국정<한국사> 교과서처럼 친일과 독재를 대놓고 미화하는 내용은 많지 않다. 대신 친일과 독재에 대한 양비양시론을 부추기는 작성기법은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뉴라이트 학술세미나 발제자가 대표 집필한 역사 교과서
이 교과서의 대표집필자는 이병철 교사(경북 문명고)다. 이 교사는 지난 2022년 8월 26일 뉴라이트 단체로 분류되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사무실에서 연 ‘역사연구원 제7차 학술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여했다. 이 세미나는 2013년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로 지목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를 집필한 이명희 교수(공주대)가 기획한 것이다.
이 세미나 관련, 뉴라이트 대부로 불리는 김진홍 역사연구원 이사장(목사, 전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은 ‘초대의 말씀’에서 다음처럼 강조했다.
“주제발표자 이병철 등 고교 선생님들이 세 분이나 발제를 해주셨다. 참으로 장한 일이다. 다음 번 검정에는 이 분들이 주축이 되어 검정교과서를 서너 종 출원했으면 한다. 혹 불합격하더라도 대안학교에서 그 수요가 있을 것이다.”
김 이사장의 이 같은 권고 뒤 이병철 교사는 실제로 <한국사> 교과서 검정을 출원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교과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날 발제에서 이병철 교사는 ‘TV의 역사 교양프로그램을 통한 역사 지식의 전달·소비 실태와 문제점’이라는 주제 발제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은 좌파 성향의 인물들이 수십 년간 방송 미디어에 진출하여 각 분야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방송 미디어를 통해 좌편향된 교육을 학생에게 심어 대한민국의 국가관과 자유시장 체제를 뒤엎고 좌파 중심의 국가 주도 체제를 실현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세미나에서는 양비양시론을 넘어 아예 색깔론을 펼친 것이다.
“왜색 지우려다 오히려 정신 타락한 한국” 주장한 또 다른 집필자
같은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으로 이름을 올린 배민 교수(부산외대, 당시엔 서울 숭의여고 교사)는, 역사연구원이 한 달 뒤에 주최한 제8차 학술세미나에 토론자로 나와 “언제까지 학생들이 사실과 거리가 먼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을사늑약,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에 집착하는 역사 인식을 지속해 나가도록 방치할 것인가”라면서 “일제의 지배 정책은 사실상 착취라기보다는 동화가 그 본질이었다. 오히려 진정한 착취와 수탈 관계는 일제시대의 한국인과 일본인의 관계였다기보다는 조선 사회 속 양반과 농민의 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배 교수 또한 양비양시론 대신 기존 <한국사> 교과서의 ‘일제 비판’ 내용에 대해 저격했다. 배 교수는 우익 매체인 ‘펜N마이크’ 올해 2월 16일자 기고 글 ‘민족주의 없는 한국사는 가능할까’에서 다음처럼 주장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한국은 87년 체제 이후 사회의 정신 수준이 타락하고 오만해지고 사치스러워졌는데, 이는 '왜색을 지우기' 위해 노력한 아이러니한 결과다.”
당연히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배 교수 또한 자신의 교과서에서는 양비양시론이지만 일반 글에서는 친일 성향 글을 써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종’ 대신 양비양시 ‘순한 맛’ 택한 음흉한 교과서
그럼 이들은 왜 교과서에 자신의 속마음 대신 양비양시론을 내세운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김진홍 목사가 이병철 <한국사> 교과서 대표집필자에게 ‘검정 출원’을 권고한 2022년 8월 26일 그 세미나 자료집에 실려 있다.
이날 실명을 감춘 ‘고교 역사교사’는 발제에서 “지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실패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중의 하나는 얻어맞을 수 있는 표적이 하나였다는 것”이라면서 “어떻게든 3종 이상 다수의 (검정) 교과서를 만들어내면 비판의 표적을 분산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3종 이상 다수의 검정교과서 출원 계획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하나의 검정교과서를 출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학력평가원에서 낸 <한국사> 교과서로 보인다.
당시 세미나에서 이 ‘역사교사’는 “‘기독교계 대안학교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바른 뜻을 마음껏 펼치고, 다음 단계로 그 ‘순한 맛’의 ‘검정교과서’를 내놓는 것이 맞는 순서”라고 제안했다. 교과서 검정 출원 관련 나름의 전략전술을 제시한 것이다.
이 말에 비춰본다면 해당 <한국사> 교과서에서 엿보이는 양비양시론은, 특별한 목적을 위한 ‘순한 맛’ 교과서 집필의 결과인 것이다.
대개의 양비양시론엔 숨겨진 목적이 있다. 이 친일 뉴라이트 성향의 <한국사> 교과서 또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 교과서는 ‘친일독재 미화’라는 속마음을 숨긴 음흉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윤근혁 교육의창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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