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자유주의 국제질서' 속 한국은 뭘 고민해야 하나
미 우크라 무기지원 중단, 관세에 '새삼' 놀라는 세계
우크라전 종식, 미·러 관계의 정상화가 야기할 변화
미 유일 초대강국 지위 반납, 다극화 질서 인정 시사
관세-방위비-북·미 회담, 트럼프의 '한반도 아젠다'
북한 비핵화, 막연한 기대에 다른 걸 포기할 건가
한반도 문제 본질 살필 기회…담대한 거래 탐색을
세계는 워싱턴에서 날아 온 두 건의 뉴스에 '새삼' 놀랐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3일 잠정 중단했다. 또 한 달간 유예했던 관세전쟁에 본격 돌입했다. 멕시코, 캐나다 제품에 각각 25%, 중국산 제품이 10% 추가 관세가 4일부터 부과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 구상'은 갈수록 윤곽이 뚜렷해지고 있다. 우크라의 팔을 비틀더라도 전쟁을 끝내고, 미·러 간 경제적, 안보적 협력에 나서겠다는 것.
맞대응 수단이 있는 나라는 카드를 내밀고, 없는 나라는 비난하고, 탄식하며, 미국의 변화를 희망한다.
세계가 트럼프의 손바닥 안에서 아등바등한다. 기시감을 주는 '게임'의 양상이다.
쥐고 있는 카드의 위력이 관건이다.
중국은 트럼프 관세의 발효 1분 만에 준비한 카드를 내밀었다. 맞불 관세와 희토류 수출 통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의 대응 패키지를 발표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미·중 무역전쟁 18개월 만에 '1단계 합의(2020년 1월)'에 이르게 한 필살의 무기를 다시 꺼낼 거라는 뉴스를 흘리고 있다. 미국산 농산물 최대 수입국이 보유한 카드다.
캐나다는 300억 캐나다 달러(약 30조 원) 규모의 보복관세를 우선 발표했다.
멕시코 정부는 관세, 비관세 조치를 포함한 '플랜B'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우크라는 미국의 무기 지원 잠정 중단으로 전쟁 수행 능력에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됐다. 지난 28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트럼프와 J.D. 밴스 부통령과 한바탕 대거리를 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의 처지다.
지난 2일 런던에서 열린 우크라 평화 긴급 정상회의에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유럽 회원국들이 기존 지원 규모를 2배 이상 늘리지 않으면, 미국이 빠진 구멍을 메울 방도가 없다.
전황은 러시아 쪽으로 기운 지 오래. 2023년 6월 시작한 대반격이 무위로 끝났고, 작년 8월 전격 공격한 러시아 쿠르스크 점령지의 반 이상을 빼앗긴 상태.
'미국 없는 방위' 고민을 시작한 유럽 역시 허둥대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가 유럽에 위협인가?

트럼프는 '오래된 현재'이기도 하다. 햇수로 9년째이고, 트럼프 2기 임기를 합하면 12년 동안 반복해서 볼 현상이다. 다음 대선 역시 트럼프가 아니더라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진영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바이든은 코로나19 덕분에 당선됐다가 코로나19가 동반한 인플레에 무너졌다.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후보는 유권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미국의 MAGA화는 2017년 이후 멈춘 적이 없다. 세계가 새삼 놀라는 게 놀라운 이유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자유무역은 끝났다.
트럼프의 드문 장점은 솔직하다는 점이다. 미국과 세계에 대한 구상을 수없이 내놓았다. 한국시각 5일 오전에 나올 그의 2기 첫 국정연설 역시 기존 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터.
이쯤 되면 트럼프도 문제지만, 귀담아듣지 않은 세계도 문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해 11월 미국 대선 국면을 돌아보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 기성 언론은 희박한 근거에 기대 해리스 후보의 당선을 점쳤다. 국내 기성 언론의 '복사 저널리즘' 탓에 많은 국민이 덩달아 오판했다. 앙시앙 레짐(구체제) 중독 증상이 트럼프 당선 뒤에도 넉 달째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트럼프도 변할 거라는 막연한 낙관도 남아 있다.
트럼프 시대 또는 '포스트-자유주의 국제질서' 시대에 적응하려면, 먼저 익숙한 세계와 작별해야 한다.
"미국이 어떻게 이럴 수가…"라며 비난하고, 탄식하며, 분노할 수 있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해서 윤리적 관점을 먼저 버려야 한다. 윤리는 구조적으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이분법을 전제한다.
트럼프가 틀렸다고 판정하는 이들은 스스로 우월한 지위에서 생각하지만, 실제론 열등한 지위에 있다. 미국 민주당이 그렇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집단 서방의 상당수 기성 언론 및 이를 섭취하는 먹물들이 그렇다. 관료야 일러 무엇하겠나.
백악관에서 한판 설전을 벌인 젤렌스키처럼, 지위의 비대칭성을 단숨에 극복하는 '정신승리'를 잠시 맛볼 수 있겠지만, 그 결과는 참담할 수 있다. '바라는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천착하는 현실주의 정치학적 사고가 유용한 시점이다.
트럼프가 1기 행정부 당시 자신의 외교노선을 설명한 말도 '원칙적 현실주의(principled realism)'였다.
"미국은 분쟁과 갈등이 아닌, 조화와 우애를 추구하되, 이념이 아닌, 결과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2기에도 이어지는 세계관이다.
트럼프의 말은 뒤죽박죽이라 해독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자주 숫자가 틀리고, 팩트를 무시한다. 하지만 방향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차피 디테일은 합의서에 명토 박기 전에는 중요하지 않다.
2기 트럼프 행정부 주요 인사 가운데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그나마 정리된 메시지를 내놓는다.

루비오 장관은 지난 1월 30일 메긴 켈리 쇼 인터뷰에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자국의 국익을 추구할 기회를 미국이 잃어버린 건, 냉전의 끝에서 생각을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승자의 저주'였다는 해석이다.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이 되면서, 많은 분야에서 세계 정부의 책임을 떠안기 시작했다. 모든 문제를 풀려고 했다"라는 것. 다른 나라들처럼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겠다는 '아메리카 퍼스트'가 탄생한 배경이다.
루비오는 놀랍게도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스스로 내놓을 준비가 돼 있음을 시사했다.
"세계에 단 하나의 강대국이 있는 건 쉽게 말해 정상이 아니다. 비정상이다. 그게 바로 냉전의 끝에 만들어진 생각"이라고 했다.
"궁극적으로 다극화된 세계, 세계 곳곳에서 복수의 강대국이 등장하는 시점에 이르게 된다"라는 말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강조해 온 다극화 세계질서를 거부하지 않겠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상원 인준청문회(1.30.) 모두발언에서는 아예 "2차대전 이후 세계질서는 단순히 낡은 게 아니라, 이제 미국에 대한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고 짚었다.
미국은 더 이상 추상적 가치에 충성하지 않는다. 중국을 견제하면서도 평화를 강조한다. 평화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국방예산도 줄인다.
물론 트럼프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동의하기 어렵다. 대체 언제 미국이 국익을 소홀히 한 적이 있었나. 냉전의 한복판에도 주한미군 방위비 인상을 요구했으며, 1980년대 슈퍼 301조를 들고 한국산 제품의 수출을 막았던 나라다.
직전 바이든 행정부는 어떠했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과학법에 따른 보조금을 미끼로 한국을 포함한 각국의 주력산업 공장, 즉 일자리를 미국으로 옮겼다.
문제는 게임의 규칙을 여전히 미국 대통령이 정한다는 현실이다.
우크라전 종전과 미·러 관계 정상화를 두고 우크라와 유럽이, 관세 인상을 두고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이 먼저 시험대에 올랐다.
젤렌스키와 유럽의 선택은 어느 정도 끝이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젤렌스키는 울며 겨자를 먹더라도 트럼프가 요구하는 영토 '양보' 또는 포기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선택지가 궁하다.
유럽은 '전략적 자율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방위 부담을 떠안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능력이 있다는 트럼프의 평가가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문제는 한반도다.
트럼프의 한반도 아젠다는 이미 공개돼 있다. 추가 관세와 주한미군 감축 또는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 북미 직접대화. 각각 또는 동시에 진행될 시점이 시나브로 다가온다.
새삼 놀라는 것도 문제지만, 대책을 세운답시고 항목별로 주판알을 튕기는 것도 바람직한 준비는 아닌 것 같다. 되레 트럼프의 프레임에 포획되는 지름길이다.
낱개로 지불 고민을 하는 대신 통으로 거래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청구서에 적힐 부채를 자산으로, 자산을 부채로 돌릴 수 있다는 역발상도 배제할 이유가 없다.
미국의 대중 견제가 주임무인 캠프 험프리스는 우리가 추가 부담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건설비의 92%(약 100억 달러)를 국민 세금으로 충당했다.

주한미군은 2만 8500명 선. 트럼프는 주한미군을 감축할 생각은 있지만, 캠프 험프리스에서 철수할 생각이 없다. 경제적, 안보적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방위비 분담금 2배 인상을 요구하면, 오히려 우리가 먼저 주한미군 절반 감축을 제안할 수는 없을까.
관세 전쟁이 결국 모두가 잃는 게임이라면, 평균 수준의 손해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에겐 관세 부담보다 한반도 평화가 중요하다.
과도한 부담과 과도한 전쟁연습은 되레 동맹에 대한 한국민의 반발을 야기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흔든다.
물론 돌이 뒤에서 날아들 수 있다. 주한미군이 줄면 큰일 날 것처럼 손사래 칠 국내 일각의 여론에 맞서, 담대한 거래의 조건을 내밀 지도자는 언제쯤 출현할까.
중요한 것은 우리 조건의 하한선일 터. 그걸 찾는 첫걸음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협'의 정체를 파악하는 작업일게다.
북한은 또 중국은 과연 우리에게 실존적 위협일까, 위협이라면 임박한 위협일까, 잠재적 위협일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북한 비핵화는 우크라가 크림반도를 포함, 1991년 영토를 회복하는 것만큼 어려운 문제다. 핵이 포함된 전쟁을 치르기 전에는. 그래도 계속 북한 비핵화를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까.
대한민국의 생존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최종 조건이 과연 주한미군의 현 수준 유지일까. 재래식 전력에서 압도적 격차를 넓히면 미제 핵우산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트럼프 시대가 우리에게 새삼 환기한 묵직한 질문들이다.
트럼프가 휘젓는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서, 우리 문제의 본질을 톺아보는 건 나쁘지 않은 기회다.
세계가 바뀌고 있다.
국민적 토론의 새로운 '향도'가 등장할 시점이다.
김진호 에디터gino777@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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