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적 대법원장’과 재판독립이라는 형용모순
‘박근혜 국정농단’과 ‘양승태 사법농단’이 사실상 한몸이었듯이, ‘윤석열 친위쿠데타’와 ‘조희대 사법쿠데타’는 하나의 세트였다.
사법농단 세력이 지음지교의 심정으로 재판을 거래하고 사법부 독립을 무너뜨렸다면, 사법쿠데타 세력은 내란 세력의 편에서 우두머리를 풀어주고, 절차와 관행을 파괴하며 정치적 중립을 팽개치고 대선에 개입하려 했다.
두명의 대통령이 헌법 위반으로 탄핵당할 때마다 사법부의 치부가 드러났고 신뢰는 추락했다.
지난 8년간 사법부는 절치부심의 개혁은커녕, ‘제왕적 대법원장’ 권력을 되레 강화하고 폐쇄적 엘리트주의가 판치는 조직으로 한번 더 타락한 것으로 보인다.
조희대 원장은 침묵과 무시로, 지귀연 판사는 궤변과 거짓말로 눈앞의 위기만 넘기면 된다는 듯 버틸 수 있는 근거가 여기 있지 않을까.
그 적나라한 단면을 26일 열리는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상정한 안건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재판독립’을 앞세운 의견이 ‘사법신뢰’보다 세배나 많았다고 한다.
회의 결과는 두고 봐야겠지만, ‘지귀연 판사를 내란 재판에서 배제하고 조희대 원장은 사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의 상식과 다수 법관의 인식에 괴리가 크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개별 재판을 이유로 한 각종 책임 추궁과 제도의 변경이 재판독립을 침해할 가능성에 깊이 우려”한다는 안건은, 사법권을 신성불가침 영역이라고 여기는 판사가 많다는 증거다.
윤석열 내란 재판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대법 판결이 평범한 “개별 재판”인가.
지귀연 판사는 고의적이며 위법적으로 법을 왜곡해 내란 우두머리의 구속을 취소한 ‘역사적인’ 잘못을 저질렀고, 조희대 원장은 내란 실패로 열린 조기 대선의 제1야당 후보를 선거에서 배제하려고 획책했다.
둘 다 사법부가 전면에 나서 헌정질서를 교란한 초유의 사건이다. ‘개별 재판’이라는 평상시 언어로 규정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니다.
지금 상당수 국민은 사법부의 도발적 일탈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지귀연 판사 룸살롱 의혹 제기와 이재명 후보의 대법관 증원 공약 등은 그런 여론의 반영이다.
더구나 모든 현안과 쟁점이 논의되는 선거 공간에서 내놓은 사법 개혁 공약을 재판독립 침해라고 규정하는 건, 민주주의 요체인 선거를 부정하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혹시 사법 제도는 영원불변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마치 왕권신수설처럼 신으로부터 사법권을 부여받은 거라고 생각하는가.
실제로 판사를 탄핵하는 미국과 일본, 사법부 자체적으로 파면하는 영국은 독재 국가인가.
대법관이 300명인 독일은 민주 국가가 아닌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정당한 감시와 제도 개혁 논의조차도 독립 침해라고 강변하고 있다.
사법권은 국민이 법관에게 위임한 것이고, 위임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하는 주체도 국민이다. 책임을 추궁하고 제도를 변경할지 판단하는 것도 국민 몫이다.
사법부가 감히 주권 침탈을 기도하거나, 중대 국사범의 구속을 취소하지 않았다면, 거론조차 되지 않았을 비상한 조처들이다.
법과 절차를 먼저 어기고 신뢰를 무너뜨린 것은 사법부다. 재판독립은 법관대표회의 안건이 규정한 것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가치”가 아니라, ‘헌법과 법률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만) 보장되어야 할 가치’라는 점을 깨닫기 바란다.
두번의 대통령 파면 사태 막바지마다 사법부라는 숨겨진 권력이 드러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시대착오적인 정치권력이 무너지자, 이를 법률적으로 떠받치던 음습한 배후 권력이 햇볕에 드러난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몰래 나쁜 짓을 하다 정의로운 판사(이탄희)에 의해 폭로된 사법농단과 달리, 이번엔 사법부 스스로 마각을 드러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비판의 사각지대에서 쌓아 올린 기득권의 요새에서, 오만과 편견에 젖어 권력을 휘두르다 제 발등을 찍은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 이래 사법부는 한번도 제대로 개혁된 적이 없다.
독재자의 명령을 받아 자판기처럼 판결을 찍어내던 조직의 정점에 있던 대법원장은, 독재자가 사라지자 스스로 제왕이 되었다.
제왕적 대법원장과 재판독립은 형용모순이요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대법관들조차 대법원장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비민주적 구조가 이번에 확인된 것 아닌가.
법관 대표들이 정말로 재판독립을 원한다면, 대법원장이 인사권을 통해 행사하는 절대권력부터 타파하자고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요구해야 한다. 사법쿠데타 세력 청산과 국민 신뢰 회복 대책을.
이재성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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