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 촉석루 아래 남강에 있는 의암
남한의 논개와 북한의 계월향
논개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여러 문사들의 단골 노래주제였다. 조선 후기의 문사 허회(許澮 : 1758~1829)는 <촉석루 현판의 운을 따라>라는 시에서 ‘붉게 떨어지는 바위 꽃은 장한 혈기 머금었고 / 푸른 강물에는 의기의 수심이 서려 있네’라고 노래했으며, 다산 정약용은 <촉석루를 회고하며>라는 시에서 ‘옛날 그 물결 위엔 꽃 같은 가인의 춤이 어리고’라고 노래했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지사들이 논개에 자신의 심경을 실어 읊었다. 그 중 유림(儒林)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였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왜놈들 날뛰니 새로 걱정이 생기네 / 의기암 강가엔 물결만이 분노하는데 / 우리들은 어찌하여 속절없이 노니는가’라고 논개를 빌어 식민지 시대인들의 무심을 비판했다.
이런 노래 중에 논개와 평양의 계월향(桂月香 : ?~1592)을 함께 읊은 시들이 있다.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 : 1824~1894)의 <논개암에서>라는 시가 그것인데, 이 시에서 그는 ‘아름다운 넋은 용궁으로 모셔졌네 / 용궁은 바다에 통한다는데 / 멀리 대동강과도 통하겠네 / 대동강에도 의로운 기생이 있어 / 왜놈의 배를 칼로 찔렀다네...’라고 논개와 대동강의 의로운 기생 계월향을 연결시켰다.
계월향은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의 애첩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敵將)에게 접근한 다음 김응서를 성 안으로 끌어들여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하고 자신은 자결했다.
논개와 계월향을 함께 노래한 또 다른 시인이 만해 한용운이다. 한용운은 일제시대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라는 시와 <계월향에게>라는 시를 써서 조선을 대표해 왜군과 싸운 두 의인을 추모했다. 그중 <계월향에게>라는 시에서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 ... /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라고 노래했다.
일제시대에 왜장을 죽인 두 여인을 노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였다. 그리고 현재에도 이는 마찬가지로서 남한에는 논개요 북한에는 계월향인데, 아쉬운 점은 남한 사람들은 계월향을 잘 모르고 북한사람들은 논개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이 또한 분단이 남긴 단절의 하나일 것이다.
* ‘이덕일의 여인열전’(김영사) 중에서 발췌함.
4백년 미스터리와 대논쟁의 현장답사
진실 둘러싼 논쟁 아직도 뜨거운데
순국의 현장은 낙서로 오염돼
鄭淳台 <시사월간 WIN 편집위원>
史實과는 年代가 어울리지 않는 口傳
논개가 최경회의 부실이 되는 전 단계에 관한 얘기인데 최경회의 행장을 기록한 『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와 비교해 보면 연대가 맞지 않는 모순점이 드러난다. 즉 최경회가 장수현감을 재임한 시기는 1577~1579년이었는데 그때는 1574년생인 논개의 나이가 너덧살에 불과했다. 그런 논개를 김풍헌이 며느리가 아닌 민며느리로 맞아들이려고 했다고 할지라도 어색하다. 1592년 8월 전라우의병장으로 추대된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남원을 거쳐 장수로 진출했다. 장수라면 14년 전 그가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공덕비가 세워진 고을이었다. 그런 만큼 그에게 장수현은 모병과 병참에 유리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군의 세력 범위에 들어간 경상도와 접경지역이어서 접적이동(接敵移動)면에서도 편리한 지역이었을 터이다. 최경회의 의병은 장계면 월강평(月岡坪)에 유진(留陣)하면서 의병을 초모하여 조련을 시켰다고 한다. 최경회 부대의 병력은 1천6백명이었다. 월강평은 장계4거리에서 26번 국도를 통해 5리쯤 동진하면 왼편으로 펼쳐진 넓다란 들인데, 북쪽 산기슭에는 최경회의 위패를 모신 월강사(月岡祠)가 보존되어 있다. 장수 일대의 사적을 답사한 후 들렀던 찻집에서 『WIN』 역사인물탐구팀은 우연하게 김상두(金祥斗) 장수군수를 만나 논개사적지의 확장·정화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들었다. 김군수는 장계면의 논개 생가와 장수읍의 의암사 그리고 함양군 서상면에 있는 논개무덤을 삼각형으로 잇는 「민족정신 교육의 장」 건설을 구상하고 있다. 현재 시공 중인 대전~진주간 고속도로의 완공 후(2001년 11월 개통) 논개 사적지를 찾는 참배객 수가 크게 늘어날 것에 대비하고, 이에 따라 낙후된 지역경제도 활성화시킨다는 민선 지방자치단체장다운 계산이다. 김군수에 따르면 현재 경내 부지가 1만평에 불과한 의암사는 2만7여천평의 주변 토지를 사들여 3만7천평 규모로 확장하고 영상교육관·휴게실 등 부대시설을 갖추게 된다. 44억원의 사업비(국비 22억원·지방비 22억원)가 투입되는 확장사업은 토지매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어 곧 토목·건축·조경공사에 들어갈 단계다. 장수군은 의암사와 논개생가 사이에 11km의 직선도로를 개설할 계획이다. 논개 생가와 함양군의 논개 묘역도 민재에다 임도(林道)를 닦아 연결시키기로 했다. 임도 개설은 작년 말 김상두 장수군수와 정용규 함양군수가 민재의 정상에서 만나 절반씩 책임지고 실현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死後 4백년 만에 족보에 오른 「義巖夫人」 『WIN』 역사인물탐구팀은 「논개묘」를 찾아 26번 국도를 통해 육십령(해발 1,264m)을 넘어 함양군 서상면으로 진입했다. 육십령은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道界)인데 옛날엔 도적과 맹수가 많아 최소한 60명이 작당해야만 넘을 수 있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 험한 고개다.
그러면 장수사람인 논개와 화순사람인 최경회가 왜 함양땅에 묻혀 있을까? 『진주성에서 패전하고 흩어졌던 전라도 출신 의병들이 진양(晉陽)벌의 지수(智水)목 남강 하류에서 논개와 최경회의 시신을 수습했답디다. 의병들은 한여름 2백20리 길을 왜병을 피해 가며 두 시신을 운구하여 논개의 고향 가는 길목이며 의병들의 창의지인 덕유산의 자락인 이곳에 묻었대요. 논개부인은 기생으로 오해를 받아 그 시신이 고향에 못 갔다고 합디다』 논개의 후손으로서 방지마을에 사는 주규상씨(68세)의 말이다. 주규상씨에 따르면 방지마을은 원래 신안주씨의 집성촌으로 그의 15대조이며 논개의 조부인 주용일도 장수로 이주하기 전에는 방지마을에서 살았다. 그러면 방지마을 신안주씨들은 「논개」를 어떻게 대접했을까? 『기생이라고 하는 바람에 조상의 얼굴에 먹칠했다고 묘소를 돌보지 않았는데 1958년 장수사람 20여명이 찾아와 제사를 올린 이후 방지마을에서도 벌초도 하고 관심도 기울여 왔습니다』 그렇다면 논개의 시가쪽인 해주최씨 문중에서는 논개를 어떻게 인식해 왔을까? 『WIN』 역사인물탐구팀은 남해고속도로를 통해 최경회의 고향인 화순으로 진입하여 우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최재양(崔在襄)씨를 만났다. 해주최씨인 그는 『해주최씨세보』 그리고 『일휴당실기』 『최씨육의록』(崔氏六義錄)의 영인본 등 최경회 관련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의암부인 신안주씨」가 해주최씨의 족보에 오른 시기는 1975년부터였다. 그 당시 해주최씨 문중에서는 「의암부인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거쳐 다수의견에 따라 족보에 올렸다고 한다. 논개가 최경회의 측실이라는 사실은 1905년 송병선이 지은 『동감강목』(東鑑綱目)에서도 이미 「慶會妾 論介 誘倭將 游南江中巖石上 抱倭將墮水而死」(경회의 첩 논개가 왜장을 유인하여…)라는 기록이 있는 만큼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이번 논개 사적 답사에서 『WIN』 역사인물탐구팀은 기록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지금도 논개는 사실(史實)과 전설(傳說)의 혼돈 중에 휩싸여 있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얘기가 있기는 하지만 정확한 고증이나 답사가 없는 기록은 역사를 왜곡할 우려가 짙다. 논개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과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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